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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799
한자 朴相囿孝子碑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목동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승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19년 3월연표보기 - 박상유 효자비 건립
현 소재지 박상유 효자비 현 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목동리 지도보기
성격 효자비
관련 인물 박상유(朴相囿)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너비,두께) 147㎝[높이]|45㎝[너비]|19㎝[두께]
소유자 밀양 박씨 가문
관리자 밀양 박씨 가문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목동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효자 박상유의 효자비.

[개설]

1870년경 이목동에 거주한 박상유(朴相囿)밀양 박씨(密陽朴氏)로 규정공 박현의 후손 박덕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삼년 동안 병중인 어머니의 간호에 정성을 다하였다. 다섯 손가락을 절단하여 수혈한 끝에 어머니의 수명을 연장시켰고, 돌아가신 뒤에는 3년간 시묘를 하였다. 박상유의 효행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박상유는 평소에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동정심이 많았던 사람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부모님을 편안하게 모시려고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어머니께서 속병으로 앓아눕게 되었다. 어머니의 병환을 고치려고 효험이 있다는 약은 다 써 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러자 박상유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물을 떠 놓고 하느님께 빌었다. “제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기에 이렇게 어머님의 병환이 나을 줄 모르고 깊어만 갑니까” 하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하루하루 지나도 어머니는 사경을 헤맸다. 박상유는 눈물을 머금고 기도를 올리며 “한 분밖에 안 계신 어머니를 어떻게 해서라도 살려만 주십시오” 하고 더욱 크게 외쳤다. 그러다가 울다 지쳐서 잠이 들었다. 꿈속에 흰 백발의 산신령이 나타나 굵은 음성으로 “너의 효성이 지극하다. 내가 너의 어머님을 살리는 묘안을 가르쳐 주겠다”라고 하였다.

박상유는 뛸 듯이 기뻐서 머리를 조아리며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라도 살려야 됩니다. 만약 돌아가시게 되면 저는 무슨 낯을 들고 이 세상에서 살며 그 불효는 어디에 가서 씻겠습니까?” 하니 탄복한 산신령은 “그러면 너의 다섯 손가락을 잘라서 나오는 피를 어머니께 드려라. 그리하면 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박상유는 하도 기뻐서 펄펄 뛰었다. 그러는 바람에 꿈에서 깨어났다. 일어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편으로는 어머니를 살릴 수 있다는 마음에 기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 다섯 손가락을 자른단 말인가 하고 걱정이 되었다.

박상유의 눈앞에는 어머니가 괴로워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마침내 결단을 내려 다섯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어머니께 드렸다. 그러자 어머니는 씻은 듯이 완쾌되었다. 그 후로도 어머님께 효도를 더욱 극진히 하였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후 어머니는 극진한 아들의 효도를 다 받지 못한 채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러자 박상유는 눈을 감고 지금까지 어머니께 해 드린 것을 생각해 보았다. 내가 나서부터 지금까지 자란 것이 어머니의 덕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고 크게 통곡한 후 하늘을 보지 못하는 죄인이라며 어머니 묘 옆에서 초막을 짓고 3년간을 떠나지 않았다.

박상유는 부모에게만 효도한 것이 아니라 형제간에도 사이가 좋아 동생을 지극히 사랑하였다. 이와 같이 효행과 형제간의 우애를 실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박상유를 보고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효도는 백 가지 행동의 근본이라고 하였듯이 박상유는 모든 행동에 남달리 뛰어나 『농가집』 등의 문집도 펴냈다. 효암 서원의 서첩(書帖)에 박상유의 정성 어린 효행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후세 사람들까지도 본받을 수 있게 되었다.

[건립 경위]

박상유 효자비(朴相囿孝子碑)는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순창 군민들의 도움을 받아 세웠다.

[위치]

순창군 금과면 목동리 이목 마을 동쪽 어귀 길가에 있다.

[형태]

재질은 화강암이며 규모는 높이 147㎝, 너비 45㎝, 두께 19㎝이다.

[금석문]

비의 전면에는 ‘증동몽교관 효자 박공 상유 비(贈童蒙敎官孝子朴公相囿碑)’라고 쓰여 있다. 도유협흡(屠維協洽)[기미년, 1919] 3월에 박관(朴寬)이 글을 짓고, 김녕 김씨(金寧金氏) 김열권(金烈權)이 썼다.

[현황]

순창군 금과면 목동리 이목 마을밀양 박씨 가문에서 관리하며,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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