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17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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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地神- |
이칭/별칭 | 걸궁,뜰볿기,모주털이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매우리|동계면 구미리|팔덕면 덕천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황금희 |
[정의]
전라북도 순창 지역에서 음력 정초에 걸립패가 지신을 달래고 복을 비는 풍습.
[개설]
지신밟기는 음력 정월 초사흗날부터 대보름까지 풍물패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지신(地神)을 진압함으로써 악귀와 잡신을 물리치고 마을의 안녕과 풍작을 기원하는 세시 풍속이다. 순창 지역에서는 이를 걸궁(乞窮), 뜰볿기, 모주털이 등이라고도 한다.
[연원 및 변천]
마을 사람들이 지신밟기를 시작한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한 연대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공동체의 제사 의례의 일종으로 세시 풍속에 포함된 시기는 상당히 오랜 연원을 지닌다.
형식과 연희 시기는 다소 다르지만 잡귀를 쫓아내고 복을 부르기 위한 의례는 조선 시대 민간에서 행하였다는 기록을 성현(成俔)[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 2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이미 원화소복(遠禍召福)을 위한 의례가 민간에도 널리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1930년대의 세시 풍속을 기록한 오청(吳晴)의 『조선의 연중행사(朝鮮の年中行事)』에는 지신밟기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실려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모습과 일치된다.
이처럼 지신밟기는 섣달그믐 궁중에서 행하던 나례 의식이 민간에도 널리 퍼져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잡귀를 쫓아내려는 새해맞이 행사로 자리를 잡았다. 이것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차 의례보다는 놀이에 가깝게 변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학교와 소방대의 종을 비롯하여 각 가정의 놋그릇과 쇠를 거둬 갔었다. 그때 풍물패가 사용하는 꽹과리와 징 같은 악기도 몰수당하여 굿을 칠 수가 없었다. 그 후에도 6·25 전쟁 등 역사적 이유로 지속되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농촌 인구의 감소로 마을에 풍물을 칠 사람이 없어서 대부분의 마을에서 지신밟기가 행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절차]
대개 정월 초사흘부터 14일까지 마을 신앙의 중심이 되는 신을 위한 주산(主山)과 당산, 공동 우물 등에서 마을 전체를 위한 굿을 친 다음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지신을 밟는다. 풍물패가 집에 당도하면 주인은 주(酒)·과(果)·포(脯)의 고사상을 차리고, 술과 음식을 대접하며, 쌀이나 돈을 성의대로 희사한다. 풍물패는 그것을 모아 마을의 공동 비용으로 사용한다.
금과면 매우리 매우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걸궁을 하면서 집돌이를 했는데, 부엌[정제]굿, 장독[장광]굿, 마당굿 순으로 친다. 이때 가정에서는 상은 차리지 않고 먹을 음식을 조금 내놓았다. 그리고 걸궁을 치면서 걷은 쌀과 돈은 마을 기금으로 사용하였다. 동계면 구미리 귀주 마을에서는 마을의 부잣집부터 들어가서 마당에서 굿을 치면 술과 음식을 차리고 쌀을 내었다. 팔덕면 덕천리 태촌 마을에서는 대부분은 부잣집에서 정월에 액막이를 한다고 굿을 많이 하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당밟기 한다고 굿을 치면 굿을 보러 몰려다녔다. 신명나는 굿도 좋았지만 배가 고픈 시절에 먹을 것을 얻어먹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따라다녔다고 한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금과면 매우리 매우 마을에서는 지신밟기를 ‘걸궁’이라고 부르는데, 마을에서 경비가 필요할 때 주로 돈다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집집마다 마당을 밟는다고 ‘뜰볿기’라고도 하고, 잘 사는 집의 가양주를 먹으러 간다고 ‘모주털이’라고도 부른다. 예전에는 서민들이 배고프니까 부잣집을 먼저 찾아갔고, 닭이라도 한 마리 잡게 되면 죽을 쑤어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나누어 먹었다. 굿도 보고 술도 먹으며 모두가 즐기는 축제가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