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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중 효자정문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1858
한자 安禧重孝子旌門
영어음역 An Hijung Hyoja Jeongmun
영어의미역 Monument Shrine to the Filial Piety of An Huijung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박곡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양윤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려
양식 소로수장민도리식 겹처마 한식골기와 맞배지붕
건립시기/일시 1804년연표보기
정면칸수 1칸
측면칸수 1칸
소재지 주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박곡리

[정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박곡리에 있는 조선시대 효자 안희중의 정려각.

[개설]

안희중의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1728년(영조 4)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였는데, 그가 15살 되던 해에 폭우로 사당이 무너져 내리자 들보를 받쳐 들어 신주를 온전히 옮길 수 있도록 하였다.

1750년(영조 26) 조부가 병환에 들자 반 년 동안 간병하였다. 어느 날 꿈에 신선이 나타나서 북두칠성에 기도하면 영험이 있을 것이라고 하자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목욕 재계를 하고 단을 모아 기도하기도 하였다.

1765년(영조 41)에는 할머니가 광견에게 물리자 40일 동안 환부를 입으로 빨아내어 완쾌시켰다. 그는 만년에 거동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생전에 모시던 것처럼 매일같이 성묘를 하였다. 이러한 효행이 널리 알려지자 1804년(순조 4)에 효자 정문이 내려지고, 이곳 박곡리에 정려각을 세웠다.

[형태]

정려각은 앞면과 측면 모두 1칸으로 구성된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자연석 기단 위에 다듬은 초석을 놓았다. 초석은 하부는 팔각형으로 만들었으나 상단부는 원기둥을 세우는 것에 맞추기 위해 원형으로 다듬은 독특한 형태이다.

초석 위에는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기둥 머리에는 창방을 별도로 구성하였으나 창방 위에 주두를 사용하지 않고 기둥 머리가 연장되어 보머리와 도리를 사괘맞춤으로 바로 받도록 하였다.

창방과 도리 사이에는 창방 방향으로 화각첨차를 놓아 도리를 받도록 한 독특한 구성이 엿보인다. 앞면에는 하방 위로 모두 홍살을 넣고, 측면과 뒷면에는 중방 아래까지 화방벽을 쌓아 막았으며, 그 위로는 앞면과 마찬가지로 홍살을 넣었다.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하였으나 측면에 방풍판을 가설하지 않았다.

[현황]

정려각은 1990년대 초에 해체하여 수리하였다. 정려각 내부에는 가운데에 홍살문 형식으로 기둥을 세워 현액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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