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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의 어제와 오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2983
영어음역 Yonginui Eojewa Oneul
영어의미역 Yesterday and Today of Yongin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양화

[개설]

오늘날 용인은 첨단 산업의 중심지로 불린다. 삼성전자를 비롯하여 전자와 전기, 자동차, 원자력 등등, 모든 분야의 첨단 산업 시설과 연구소, 연수원 등이 용인 지역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보다 교통이 편리하고, 산업 시설과 연구단지가 서울을 비롯한 인근 시군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입지에 자리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90년대 이후 수지구기흥구를 중심으로 급속한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용인시는 인구 100만 명 시대의 개막을 눈앞에 두고 있다. 또 2013년을 기준으로 약 13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도시계획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옛 말로도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이니, 용인이 짧은 기간에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이전의 용인]

197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용인 지역은 주산업이 농업인 촌락 사회였다. 포장도로도 거의 없었고, 이렇다 할 산업 시설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학교와 병원을 비롯한 문화 시설 등이 열악한 낙후된 농촌 지역이었다. 농업이 중심을 이루기는 했지만 경지 정리는 물론이고 저수지나 관정과 같은 관개 시설이 거의 없었고, 양수기나 전기펌프 같은 것도 없었다.

당시 용인 지역의 거의 모든 마을들은 주로 전통적인 보(洑)를 이용한 관개에 의지하여 농사를 지었으며, 산골짜기처럼 지대가 높은 지역은 천수답이라고 하여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사를 망치기 일쑤였다. 오직 인력이나 축력(畜力)에 의지해서 농사를 짓던 시대답게 두레나 품앗이 같은 농촌 지역의 전통은 물론이고, 정월 명절부터 동지에 이르기까지 각종 세시풍속과 전통 행사가 살아 있던 시기였다.

용인 지역은 인근의 안성이나 이천, 광주나 화성 지역 등과 함께 서울의 남쪽, 즉 한강 이남에 자리하고 있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낮은 산지와 구릉지대가 많고 경지 면적이 적은 지역에 속하였다. 사통팔달하는 도로망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변변한 포장도로 하나 없었고, 도로의 폭도 좁아서 수도권에 근접한 지리적 장점을 지금처럼 살릴 수 없었다. 이렇듯 농업이 중심을 이루던 1970년대 이전 용인 지역에 있던 산업 시설이라고 해봐야 소규모 방앗간과 양조장, 제재소 등이 고작이었고, 나머지는 소규모 점포와 같은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의 용인군청은 현재의 김량장동에 있는 처인구청 자리에 있었다. 시가지라고 해봐야 지금의 우체국과 우리은행, 용인농협을 중심으로 한 지역과 김량천 건너 마평동 일부 지역에 형성되어 있을 뿐이었다. 시가지 일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도로가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자갈길이었고, 비라도 내리면 진창으로 변하는 길도 도처에 흩어져 있었다.

당시의 용인군 관내 생활권의 분포를 보면 용인군청이 소재하고 있던 김량장동이 중심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지금보다 역할과 위상이 축소되어 있었다. 신갈과 수지 일대 주민들은 수원으로 장을 보러 다녔고, 남사 일대의 주민들은 오산으로 많이 왕래했다. 원삼과 백암 일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죽산이나 안성장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모현 일대의 주민들도 용인보다는 광주군의 경안장을 보는 경우가 많았는데, 당시는 용인장보다 경안장이 장의 규모가 크고 교통도 편리한 이점이 있었다.

과거의 용인을 되돌아볼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수원과 여주를 잇던 철도 노선인 수여선(水驪線)이다. 수여선은 지금의 기흥구 흥덕지구를 지나고 신갈과 동백지구를 거쳐서 용인에 도착한 뒤, 다시 양지를 거쳐 이천으로 연결되는 철도였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던 유일한 협궤열차 노선으로, 용인을 동서로 관통하며 약 60년 가까이 존속하다 역사의 뒤로 사라졌던 수인선은, 특히 일제강점기 때는 물자 공출과 징병, 징용 등 수탈의 도구로 기능하였고, 광복 이후에는 수원과 용인으로 통학하는 학생들의 통학열차로 애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용인 지역의 농산물을 출하하는 통로이기도 하였고, 수인선과 연결되어 서해안의 해산물을 공급하는 역할도 하였다. 현재 수여선이 관통하던 노선을 따라 경전철이 부설되고 있는데,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수여선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이후의 용인]

1970년대는 모든 면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고도 성장으로 국가 경제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으며, 이러한 변화가 사회 전반으로 파급되면서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면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산업화로 인하여 이농현상이 증가하고, 대가족이 해체되어 핵가족화되었으며, 공업과 상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필연적으로 용인 지역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는데, 1971년을 기점으로 줄어들던 인구가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고, 수도권의 공장들이 하나 둘씩 이전해 오면서 용인 지역은 점차 농촌 사회를 탈피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고속도로가 용인을 관통하여 건설됨으로써 서울과 더욱 가깝게 되었는데, 이는 용인 지역에 공장이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계기로도 작용하였다.

공장과 산업 시설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인구의 증가를 가져왔고, 인구 증가에 따른 주택·교육·보건·의료·교통 문제 등을 유발시켜 사회 변동을 초래하게 된다. 1 970년대 이후의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인구의 집중 현상이다. 용인 관내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급속한 인구 증가를 보이는데, 이는 출생 등에 의한 자연적 증가보다는 사회적인 증가의 폭이 훨씬 큰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인구 집중과 증가 속도는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가속도가 붙게 된다.

1980년대로 들어오면서 용인 지역은 1988년의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분당이 개발되어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고, 이어 수지와 죽전 일대로 개발의 파고가 밀려오면서 본격적인 개발 시대로 들어간다. 수지와 죽전을 중심으로 시작된 용인 지역의 도시화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급속하게 진행되며, 점차 남쪽으로 진행되어 구성과 기흥 일대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당시 용인시의 인구와 수지 일대의 인구 변동을 살펴보면 수지지구의 개발과 변화가 얼마나 급속하게 이루어졌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수지구기흥구가 신설된 이후 기세가 수그러들기는 했지만, 이후 동쪽의 처인구 일대로 확산되면서 인구 100만 명 시대를 앞당기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1970년대 이후의 인구 증가가 용인 지역의 산업 시설 유치를 따라 필요한 인력으로 유입된 측면이 강하다면, 1990년대 이후의 인구 증가는 수지와 죽전 일대의 아파트 개발과 같은 도시화의 결과라는 측면이 강하다. 특히 수지구기흥구의 일부 지역은 1990년대 이후 더욱 급격하게 변화되며 완전하게 도시화되나, 인구의 급증과 교통 문제 등 많은 문제점도 야기하게 되는데, 이러한 영향으로 한때 난개발 지역이라는 좋지 않은 이미지를 심기도 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선 요즈음 용인은 부족한 기반 시설의 확충과 수지와 기흥구를 중심으로 한 서부 지역과 처인구 일대의 동부 지역과의 불균형 해소에 노력하고 있으며, 세계 최고 선진 용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통계로 본 용인의 어제와 오늘]

오늘날의 용인을 생각할 때,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용인의 변화를 가장 일반적이고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인구와 교육, 보건, 의료, 산업 등등을 비롯하여 우리의 일상생활과 관련한 통계 수치일 것이다. 통계는 당시의 상황을 가장 가깝게 전해 줄 수 있는 역사적인 자료이다. 용인시(당시 용인군)의 통계연보가 본격적으로 간행되기 시작한 것은 1961년(단기 4294)으로, ‘제1회 용인군 통계연보’가 시초이다. 50년 가까이 간행되어 온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용인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이다.

용인시 통계연보에 따르면, 1960년대 이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인구의 비약적인 증가이다. 1960년 106,689명이던 인구는 1970년에 96,561명으로 줄어드는 듯했으나 1980년에 135,610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계속해서 증가 추세를 보이며 2009년 기준으로 854,054명으로 늘어났다. 인구가 급작스럽게 증가함에 따라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가 크게 늘어나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대학교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는데, 이는 전국의 시(市)·군(郡)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이다.

자동차 보유대수 역시 경이로울 정도이다. 1961년에 겨우 142대인 자동차는 2009년에 317,396대로 늘어났다. 일반 전화의 경우 1961년 조사에서는 75대에 불과했으나 2000년에는 277,022대로 늘어났다. 일반 전화의 확충이나 자동차 등록대수의 증가는 생활 수준의 향상을 의미하고, 병원이나 의원의 증가는 보건복지 분야의 발전을 의미한다. 공무원 숫자나 예산 규모의 증가는 시민들에 대한 행정서비스의 확대로 이어지며, 용인시민들의 삶의 질이 더욱 향상되어 간다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의 도시 용인]

용인은 현재 대학교와 연구소, 연수원이 많은 지역으로 유명하다. 단국대학교 죽전캠퍼스를 비롯하여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경희대학교·명지대학교의 용인캠퍼스가 자리잡고 있다. 또 용인대학교강남대학교, 송담대학을 비롯하여 각종 신학대학교나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대학 과정을 가르치는 크고 작은 학교들이 있어 교육의 도시로도 이름을 날리고 있다.

그런가 하면 삼성인력개발원을 비롯하여 대웅제약연수원, 흥국생명연수원, 중소기업 인력개발원, SK인력개발원, 대우연수원 등등 수많은 연수원이 용인 각처에 있어서 전문 교육과 인재 양성에 전념하고 있다.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 명문 고등학교로 성장하고 있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부속 외국어고등학교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명실상부 교육의 도시로 자리잡고 있는 용인시가 우리나라 교육을 선도하는 고장으로 불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첨단 과학의 도시 용인]

용인에는 세계 최고의 반도체 회사인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이 있어 DRAM과 Flash Memory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술을 자랑하고 있다. 삼성 SDI 기술연구소 역시 PDP, LED, OLED를 비롯하여 차세대 디스플레이 연구에 집중하고 있으며, 원자력발전소를 설계 감리하는 KOPEC과 통신위성인 무궁화위성을 관제하는 무궁화위성관제소도 용인에 자리하고 있다.

용인은 또 우리나라 자동차 기술의 성지이기도 하다. 명실공히 우리나라 자동차 공업을 선도하는 현대자동차연구소가 마북동에 자리잡고 있으며, 현대모비스 기술연구소와 르노삼성자동차 중앙연구소, 한국델파이연구소, 현대자동차환경기술연구소 등이 용인에 둥지를 틀고 있다.

한국국토정보공사 연수원은 우리나라 지적 측량의 고향이 되었고, 코오롱건설기술연구소, 금호건설기술연구소, 대림삼업(주)기술연구원, 현대건설기술연구소, GS건설용인기술연구소 등을 비롯한 크고 작은 건설사들의 각종 연구소들도 용인에 있다. 특히 삼성탈레스 용인레이더 연구소가 있어 국방과학 분야의 연구를 선도하는 등 50여 개의 연구소가 용인 관내에 있어 과학 한국을 이끌어가고 있다. 바로 이것이 첨단 과학의 도시라고 자부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이유이다.

[교통과 관광의 도시 용인]

용인에는 에버랜드한국민속촌을 비롯하여 30여 개소에 가까운 골프장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 사통팔달하는 고속도로와 국도를 비롯한 연계 교통망은 용인시가 발전하는 데 윤활유 역할을 하였다. 연간 1,300만 명 이상의 외래 관광객이 용인을 방문하는 데는 유명한 관광지나 휴식처가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교통망도 한몫했을 것이다.

어찌됐든 이렇게 관광객이 증가하는 것은 용인에 대한 관심이 더욱 증대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용인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전국에서 최초로 건설되고 있는 경전철은 민관 협력사업의 본보기로, 용인의 교통 여건 증대와 주거 여건의 개선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따라서 용인을 찾는 수많은 관광객과 잘 짜여진 연계 교통망,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경전철 등을 감안한다면 용인은 교통과 관광의 도시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문화의 도시 용인]

용인에는 현재 경기도박물관세중옛돌박물관·한국등잔박물관·신세계한국상업사박물관·디 아모레 뮤지움을 비롯한 다수의 사립 박물관과, 한국미술관·호암미술관·이영미술관을 비롯한 수많은 미술관이 소재해 있다. 한택식물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많은 식물군을 보유한 식물원으로서 식물자원의 보고가 되었고, 특히 2008년에 준공된 백남준미술관은 비디오아트의 창시자인 고 백남준을 기념하는 미술관이다. 백남준미술관의 설립은 용인이 명실공히 백남준 예술의 고향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 연극의 대부 윤민영, 국악인 박상옥·최근순·최은호, 타악기 연주자인 유복성, 모니먼트 조각가로 이름난 이일영 등은 용인이 낳은 문화 예술인들이다. 이외에도 용인에 터를 닦고 사는 문화 예술인도 많다. 소설가 이재운·박범신 등과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였던 고 김천홍 등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 예술인들이 용인에 거주했거나 거주하고 있다.

일 년 내내 축제와 공연이 열리는 에버랜드한국민속촌 외에도, 우리랜드와 한택식물원 등에서도 사계절 내내 축제가 계속되고 있다. 용인문화원이 주관하는 포은문화제와 용구문화제, 용인예총이 주최하는 용인예술제 등은 용인을 대표하는 문화예술잔치로 이름을 얻고 있다. 또한 각 학교와 박물관, 미술관, 전시장을 통한 전시와 공연이 끊이지 않고 있어 문화의 도시 용인의 위상을 뽐내고 있다.

[용인의 미래]

용인은 이미 거대 도시가 되었다. 구(區)가 세 개나 생겼으며, 인구도 90만 명을 넘어서 100만 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수지구기흥구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개발의 바람이 이제는 처인구 일대로 불고 있다. 개발의 추세가 지금처럼 지속된다면 머지않아 수도권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시(市)로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면에서 전통의 파괴를 의미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뜻하기도 한다. 용인시에 살고 있는 시민들 가운데 누구도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거부하거나 비켜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 즉 동서간의 화합이나 용인시민으로서의 정체성 확립, 애향심 제고 등에 대한 관심과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용인은 급속한 도시화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 수지구기흥구 일대가 현대적인 아파트촌으로 변모하면서 전통 마을이 송두리째 사라졌고, 난개발에 따른 비판과 민원의 홍수를 겪었다. 부족한 사회간접 시설에 대한 투자가 계속되고 있으나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요됐음에도 완전한 해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이러한 실책을 처인구에서도 또다시 되풀이한다면 우리는 후손들에게 낯을 들기 어려울 것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7.04 기관명 현행화 지적공사 연수원 -> 한국국토정보공사 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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