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때 경인로는 이렇게 포장된 길이 아니고 흙길이었어. 기찻길 말고 인천에서 서울 가는 유일한 육로였지” 권이홍[1931년생] 씨에게 ‘주막거리’에 대해 묻자 경인로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먼저 풀어 놓는다. 수궁동 마을 입구 부근에 형성됐던 주막거리는 서울 영등포구청에서 오류동으로 자동차 도로가 나기 전인 1966년까지 인천에서 서울로 오가는 이들이 쉬어 가던 길목...
수궁동에는 조선 시대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총 여섯 개의 가문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궁동의 전의이씨·안동권씨, 온수동의 상주박씨·진주유씨·전주이씨·제주고씨 등이다. 이중 온수동의 집성촌 성격은 궁동에 비해 많이 약해졌다. 제주고씨는 선산 자리에 서울온수일반산업단지[일명 온수공단]가 조성되면서 문중 묘역을 인천으로 옮겼고, 진주유씨는 마을에 남은 가구가 없다. 그...
“진녹색이 돌 정도로 농익으면 아주 맛있었죠. 초록색이라 청참외라고 불렸는데 1960년대 초까지 수궁동 여름 주 수입원이 ‘오류골 참외’였어요.” 이경노[1940년생] 씨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밭에서 오류골 참외를 직접 재배한 기억을 떠올렸다. 마을의 토박이 주민들은 오류골 참외의 생김새와 맛은 물론 재배 방법까지 상세하게 기억할 정도로 ‘참외’를 동네 명물로 기억하고...
옛 서울 도심 곳곳에는 하천이 흘렀다. 근대화가 한창이던 1960~1970년대 서울의 실개천은 콘크리트 밑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물의 흔적은 그대로 길이 됐다. 실개천을 복개한 모양대로 길이 생겼기 때문이다. 유연하게 흐르는 길 양 옆으로는 건물이 들어섰다. 궁동을 매끄럽게 지나가는 궁동길의 본모습 또한 ‘물길’이다. 수궁동의 옛 이름은 ‘수룬’이다. 마을 어른...
궁동은 1413년(태종 13) 부평도호부로 기록된 이래, 인천부와 경기도 부평군, 경기도 부천군에 속해 있었다. 1963년 서울시 영등포구로 편입되기 전까지 궁동은 논밭과 산이 어우러진 서울 근교의 땅이었다. 고려 후기 전의이씨 가문이 정착한 궁동에는 상주박씨, 진주유씨, 안동권씨, 전주이씨, 제주고씨 등 여섯 개의 성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2.67㎢의 넓지 않은...
궁동에 봄이 내렸다. 궁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궁골길 가로수가 온통 솜털같이 하얀 손을 내민다. 유래 없는 봄 한파로 2010년 서울 여의도 윤중로는 예년보다 열흘 가량 벚꽃이 늦게 만개했다. 그런데 궁동은 여의도보다 1주일이나 늦은 4월 말에도 벚꽃이 활짝 펴 있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수궁동은 서울 서남단에 위치한 풍치지구다. 풍치지구란 도시계획법 18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