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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군 계남면 만세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0312
한자 富川郡桂南面萬歲事件
영어음역 Bucheongun Gyenammyeon Mansesageon
영어의미역 The Cheers in Gyenam-myeon of Bucheon-gu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항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배현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19년 3월 23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19년 3월 24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기도 부천군 계남면 중리 소재 면사무소

[정의]

일제강점기 구로 지역에서 일어난 항일 운동.

[개설]

옛 구로 지역에 포함되어 있던 부천군 계남면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에 항거하여 독립을 요구하며 벌였던 항일 만세 운동이다.

[역사적 배경]

1910년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침략하여 국권을 강탈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 식민지 통치를 시작하면서 민족에 대한 폭력과 핍박이 이어졌다. 또한 회사령 실시로 민족 자본가의 발전을 가로막고, 토지 조사 사업으로 농민의 토지를 강제 탈취하여 일반 농민이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상황에 이르자,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거세졌다.

이러한 저항 의지는 민족 해방을 위한 거국적인 움직임으로 발전하여, 1910년대에 국외에서는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비밀결사 운동과 생존권 수호 투쟁 등의 움직임이 거세게 일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면서 식민지 약소국가의 민족해방운동의 불씨를 당겼다.

이에 조선에서도 손병희, 최린, 이승훈, 한용운 등 각계 인사 33인이 모여 독립 선언을 계획하여, 고종의 장례일인 3월 1일 정오에 서울을 비롯한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독립 선언식이 이루어짐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항일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목적]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고, 일본에게 빼앗긴 국권을 탈환하여 나라의 독립을 쟁취할 것을 목적으로 서울 지역에서 일어난 항일 만세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발단]

부천군 계남면 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23일에 이보경(李輔卿)·이무경(李武卿)·최선택(崔善澤)·이창범(李昌範)·이재경(李載卿)·이상태(李相台)·최개성(崔開城)의 주동으로 문학면 관교리에서 횃불 만세 시위운동을 벌였던 것에서 영향을 받았다. 조명원(趙明元)·조종서(趙鍾瑞)·최봉학(崔奉學)·문무현(文武鉉) 등이 항거 운동을 벌이기 위해 혈성단(血誠團)을 조직하여, 태극기와 격문 80매를 제작하고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엿다. 남북리·거잠리·을왕리·덕교리 주민에게 격문을 배포하고 150명의 주민들과 함께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과]

이러한 만세 운동의 전개와 함께 부천군 각 지역에서 격한 만세 운동이 진행되었는데, 부천군 계남면의 주민들도 이에 영향을 받아 1919년 3월 24일 만세 시위를 진행하였다. 다수의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부천군 계남면 중리에 있는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집기를 부수고 서류를 소각하는 등 과격한 만세 운동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강하게 항거하는 의사를 표현하였다.

[의의와 평가]

사건의 발생지였던 부천군 계남면은 행정구역의 통폐합 절차를 거치면서 1963년 계남면의 일부 지역이 서울 영등포구 오류출장소 항동으로 변경되었고, 1968년에는 영등포구 항동, 1980년에는 최종적으로 구로구 항동에 편입되었다. 부천군 계남면을 포함하여 인천 지역과 부천 일대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은 민족의 자유와 권리를 쟁취하고자 민간인 주도로 이루어진 적극적인 항일 운동이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부천군 계남면에서 발생한 만세 운동은 구로 지역 주민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음을 엿볼 수 있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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