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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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佛像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집필자 | 남궁현 |
[정의]
경상북도 청도 지역에 있는 불교의 예배 대상을 조성한 조각상.
[개설]
불상(佛像)이란 불교의 교리에 의한 예배 대상을 석재나 금속 또는 흙이나 나무 등의 시각 매체를 통하여 조성한 조각상을 말한다. 엄격한 의미로는 붓다, 즉 여래(如來)의 존상만을 의미하나, 넓은 의미로는 보살상(菩薩像), 나한상(羅漢像), 조사상(祖師像), 천왕상(天王像), 명왕상(明王像) 등 불교 교리에서 말하는 모든 예배 대상을 포함한다. 이들은 상을 만드는 재료에 따라 석불, 금동불, 철불, 소조불, 목불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청도 지역에는 청도 합천리 석조 아미타여래 입상, 박곡리 석조 여래 좌상, 적천사 목조 사천왕 의좌상, 청도 장육산 마애 여래 좌상 등 삼국 시대부터 통일 신라 시대와 고려, 조선 시대를 거쳐 이어져온 유적과 조각상들이 풍부하게 남아 있다. 이 유적들은 청도 지역 불교문화의 성격과 흐름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통일 신라]
통일 신라 때에는 백제와 신라의 불교 조각 전통 위에 새로이 수용되는 중국 당나라 및 인도, 서역과의 문화 교류로 불교 미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가장 국제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불교 조각도 적절한 신체 비례와 공간 분리, 양감, 사실적인 옷 주름 처리, 정교한 영락 장식의 표현 등에서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여 준다. 청도 지역의 대표적인 통일 신라 시대 조각으로는 청도 박곡리 석조 여래 좌상, 청도 합천리 석조 아미타여래 입상 등이 있다.
청도 박곡리 석조 여래 좌상은 균형 잡힌 신체 비례, 공간 분리를 통한 유기적인 신체 표현, 풍부한 살붙임 등 통일 신라 석굴암[석불사] 불상을 잇고 있는 전성기 조각으로 볼 수 있다. 도상적으로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에 이르는 장면을 표현한 우견편단의 항마촉지인 여래 좌상으로 이것은 인도와 중국을 거쳐 통일 신라 전반에 걸쳐 유행한 도상이다.
청도 합천리 석조 아미타여래 입상은 풍부한 양감의 얼굴과 신체 표현 등을 통해 청도 지역의 통일 신라 조각을 대표하는 불상 중의 하나이다.
그밖에도 청도 운문사 석조 사천왕상, 덕촌리 석불, 박곡리사지 석불 좌상 등의 통일 신라 시대 조각이 청도에 남아 있다.
[고려 시대]
고려 시대에는 지방에 선종 사찰이 많이 세워졌으며 지방 호족들의 후원으로 불교 조각도 지역적으로 발전하였다. 강릉 지역을 중심으로는 통일 신라 불상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며, 충청도 지역에서는 개성적이고 규모가 큰 대형 석조 불상들이 만들어졌다. 고려 초기에는 중국 오대, 요, 송대 불상의 영향을 받았지만 고려 나름대로의 지역성과 토착적인 조형미를 살려서 인간적인 부처의 모습으로 발전해 나갔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온화하고 정돈된 조형감을 보여주는 불상이 만들어지는 한편 원나라 왕실과의 교류로 티베트계의 라마 불교에 영향을 받은 장식적이고 새로운 불상 형식이 유행하였다.
청도 지역에는 신둔사 경내에 있는 석조 여래 입상, 신당리 석불, 청도 운문사 석조 여래 좌상이 고려 시대 조각으로 알려져 있다.
청도 운문사 석조 여래 좌상은 겉옷 안에 표현된 속옷, 전반적으로 투박해진 표현기법 등에서 통일 신라 하대 불상을 계승한 고려 초의 불상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조선 시대에는 불교를 탄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이른바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정책 등의 요인과 더불어 국가적인 후원이 줄어들어 불상은 전반적으로 쇠퇴하는 경향을 보여 준다. 그러나 예부터 뿌리 깊게 내려오던 불교는 왕실 등에서 여전히 성행했으며, 세조·명종을 비롯한 역대 왕들의 개인적인 숭불 태도 등에서 고려 시대와 마찬가지로 왕실이나 국가에서 불상을 조성하는 일이 많았다. 대체로 초기에는 고려 시대 불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나 차츰 민간 신앙과 결합하여 토착적인 성격이 강해지면서 주로 개인의 행복이나 내세를 위한 소규모와 개인용 불상이 많이 만들어졌다.
청도 지역을 대표하는 조선 시대 불교 조각으로는 적천사 목조 사천왕 의좌상, 청도 덕사 영산전 석조 여래 삼존상 및 십육 나한상, 청도 덕사 명부전 석조 지장 삼존상 및 시왕상, 청도 대운암 목조 관음보살 좌상 등이 있다.
적천사 목조 사천왕 의좌상은 천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칼을 들고 있는 남방 증장천왕, 그 뒤로는 비파를 들고 있는 동방 지국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사천왕상의 자세가 균형 잡히고 갑옷의 표현이 치밀한 우수한 조선 후기 조각에 해당한다. 1981년 6월 사천왕상 보호각 보수 공사 중 사천왕상 속에서 사리, 경판, 의류, 다라니 등 복장 유물과 복장 기록이 발견되어 만들어진 연대가 1690년(숙종 16)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어 조선 후기 사천왕상의 연대를 추정하는 데 기준이 되는 작품이다.
덕사 명부전에는 석조 지장보살을 중앙에 모시고 지옥을 다녀와 인간에게 그 실상을 알려주는 도명존자와 귀계 문을 지키는 무독귀왕이 지장보살이 양쪽에 시립해 있다. 영혼을 재판하는 염라대왕을 포함한 열 명의 시왕은 좌우에 좌상으로 모셔져 있고 그 옆으로 시왕을 돕는 녹사와 판관, 죽은 사람을 불러오는 시자 2구가 배치되어 있다. 경전과 발원문이 포함된 복장 유물을 통해 이 상들이 1678년(숙종 4)에 제작되었음과 본래 화악산 천주사(天柱寺)에 봉안되었던 사실, 제작자, 시주자 등이 밝혀졌다. 이 상을 만든 승호는 17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조각승으로 1640년에 수화승 청허와 덕유산 연수사 목조 아미타불 좌상[거창 심우사 봉안]을, 1655년에 수화승 도우와 경북 칠곡 송림사 석조 아미타 삼존 불상을 제작하였다. 덕사로 옮겨진 시기와 연유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연대와 제작자가 알려진 조선 후기 조각의 귀한 예이다.
청도 대운암 목조 관음보살 좌상은 옷 주름의 표현이 형식화되었고 몸에 장식이 적은 점, 얼굴이 방형인 점, 이목구비는 정연하나 생기를 잃은 점 등의 특징에서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전형적인 조상 양식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복장 유물의 발견으로 1654년이라는 상의 제작 연대와 본래의 소장처 등을 알 수 있게 되어 조선 후기 청도 지역의 불교 조각과 신앙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그 밖에도 대비사 석조 여래 좌상, 대산사 석조 관음보살 좌상, 대적사 석조 아미타 삼존 불상, 불령사 석조 여래 좌상, 신둔사 석조 여래 좌상, 용천사 목조 삼존 불상 등이 청도 지역에 남아 있는 조선 시대 불상이다.
[근대와 현대]
조선 시대를 이어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청도 지역의 사찰에서는 불사에 의해 다양한 불교 조각상들이 만들어진다. 보현사 석조 여래 좌상, 보현사 석조 나한상, 운문사 북대암 석조 관음보살 좌상, 운문사 북대암 석조 독성상(獨聖像), 적천사 영산전 석조 석가여래 삼존불상, 나한상 등이 남아 있다. 이들 조각상들은 신체 비례와 공간분리, 살붙임 등이 구체적이지 못하고 추상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