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5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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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仙巖書院所藏懸板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유물(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선암로 455-27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현 소장처 | 선암 서원 소장 현판 -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3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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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현판 |
재질 | 나무 |
소유자 | 선암 서원 |
관리자 | 선암 서원 |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선암 서원 경내에 있는 현판 일체.
[개설]
선암 서원(仙巖 書院)은 삼족당 김대유, 소요당 박하담을 제향하며, 강학하던 곳이다. 1568년(선조 1)에 고을 사람들이 위패를 봉안하고 향현사(鄕賢祠)라 하였던 것을 1577년(선조 10)에 군수 황응규(黃應奎)의 주선으로 운수정(雲樹亭)에서 선암(仙巖)으로 이건하고, 선암사(仙巖祠)라 이름을 고쳐 봉향하였다. 그러다가 사림에서 선암 서원으로 승원하여 봉향하던 중 1677년(숙종 2)에 군수 서문중(徐文重)이 퇴락한 사우를 중창하여 묘호를 숭경사(崇敬祠)라 고쳤다. 그리고 강당을 중수하여 사림들이 춘추로 봉향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였다.
이후 1868년(고종 5)에 사우가 훼철되어 김대유, 박하담의 제향은 단절되었다. 현재의 선암 서원은 1878년(고종 15)에 박하담의 후손 박형묵(朴衡黙), 박재형(朴在馨)이 주관하여 복원한 것이다. 이들은 선암 서원 옛터에 소요당(逍遙堂)을 새로 짓고 별도의 구역으로 담을 두른 후, 정랑(正廊)·행랑(行廊)·고방(庫房)·득월정(得月亭)을 ‘구(口)’ 자형으로 배치하여 원형대로 중건하였다. 그러나 사우(祠宇)와 쌍청루(雙淸樓) 등 일부 건물은 복원하지 못하였다. 복원 당시에는 선암 서당(仙巖 書堂)으로 이름 하였는데, 이는 사림의 공론에 의하지 않고 후손들이 자력으로 복원한 것이기에 사사로이 서원의 현판을 달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태]
현재의 선암 서원 경내에는 총 18점의 현판이 있다. 임자년 가을에 응천(凝川) 박신상(朴紳相)이 글을 쓴 「경차순상운(敬次巡相韻)」 시판[가로 53㎝, 세로 32.7㎝]은 색이 바래고, 글자도 부분적으로 훼손이 있다.
계축년에 유경립(柳經立)이 지은 「경차순상운(敬次巡相韻)」 시판[가로 35㎝, 세로 43.5㎝] 역시 색이 바래고, 글자의 부분 훼손이 있으며, 테두리는 우측 판이 사라지고 없다.
기미년 이경(李[土+敬])이 글을 쓴 「경차의정선조선암사판상운(敬次議政先祖仙巖祠板上韻)」 시판[가로 61.2㎝, 세로 28.3㎝]은 테두리에 박쥐와 국화 무늬가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국기판(國忌板)」[가로 103.5㎝, 세로 30㎝]은 마구리가 있으며, 글자는 희미하지만 알아볼 수는 있다.
「득월정(得月亭)」 현판[가로 86.7㎝, 세로 35.5㎝]은 테두리가 없고, 좌측 하단에 인장[三州 李(土+敬)]이 새겨져 있다.
「보원재(報遠齋)」현판[가로 110㎝, 세로 45.3㎝]은 흰 바탕에 검은 색 글씨로 적혀 있으며, 판의 좌측에 우석(又石) 이재면(李載冕)의 이름과 인장이 붉은색으로 음각되어 있다.
정도성(鄭道成)이 지은 「봉차상공운(奉次相公韻)」 시판[가로 33.5㎝, 세로 45㎝]은 색이 바라서 글씨가 희미한 부분도 있다.
1878년 선암 서원을 복원할 당시 만들어진 「선암서당(仙巖書堂)」 현판[가로 171㎝, 세로 56.7㎝]은 테두리에 용이 그려져 있다.
훼절 이전에 사용되었던 「선암서원(仙巖書院)」 현판[가로 124㎝, 세로 42㎝]은 테두리가 없고, 부분 훼손이 보인다.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이 전서(篆書)체로 쓴 「소요당(逍遙堂)」 현판[가로 104.5㎝, 세로 47㎝]은 미수의 인장이 붉은색으로 좌측 하단에 음각되어 있으며, 테두리는 하늘색 바탕에 나비와 꽃으로 꾸며져 있다.
1878년 박재형이 글을 쓴 「소요당기(逍遙堂記)」 편액[가로 88.6㎝, 세로 40.9㎝]은 색이 바라고 글씨가 흐린 부분이 많다. 계선이 있으며, 주변은 사주단변으로 되어 있고, 행과 자의 수는 38행 25자이다.
「소요대(逍遙臺)」 현판[가로 91㎝, 세로 41㎝]은 테두리에 국화 무늬가 새겨져 있으나 매우 흐린 상태이다. 현판의 뒷면에 묵서(墨書)로 “崇禎後光緖四年 四戊寅十月初二日 辰時立柱 初八日未時上樑 慶州 霞谷 鄭觀儉書額 辛巳閏七月 日 懸板”이라 쓰여 있다. 이를 통해보면 1878년(고종 18)에 10월 2일에 기둥을 세우고, 8일에 상량하였으며, 현판의 글은 학파(鶴坡) 정관검(鄭觀儉)[1813∼1883]이 썼고, 1881년(고종 18) 윤7월에 현판을 걸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소요정중건기(逍遙亭重建記)」 편액[가로 112.6㎝, 세로 57.7㎝]은 산남도 순사(山南道 巡使) 이근필(李根弼)[1816∼1882]이 1878년(고종 18)[무인(戊寅)]에 쓴 것이다. 테두리는 푸른색 바탕에 흰색의 꽃무늬로 꾸며 놓았고, 편액은 계선을 그려서 글을 적었는데, 광곽은 사주단변이며, 행과 자의 수는 24행 20자이다.
「소요정중창실기(逍遙亭重創實記)」 편액[가로 88.1㎝, 세로 39㎝]은 후손 박성묵(朴星黙)이 1881년(고종 18)[중광대황락(重光大荒落)] 가평일(嘉平日)[동지가 지난 후 세 번째의 술일(戌日)]에 지은 것이다. 청색 테두리에 흰색 꽃무늬가 흐리게 남아 있으며, 내용은 사주단변에 계선이 있고, 행과 자의 수는 24행 15자 이다.
「숭경사(崇敬祠)」 현판[가로 163.7㎝, 세로 67㎝]은 1677년(숙종 2)에 군수 서문중(徐文重)이 퇴락한 사우를 중창하여 묘호를 숭경사라 고쳤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17세기 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판의 색은 모두 바랬으며, 테두리는 아랫면만 남아 있다.
「쌍청루(雙淸樓)」 현판[가로 119㎝, 세로 52㎝]은 선암 서원 훼철 이전에 있었던 것이다. 테두리는 모두 온존하지만, 색이 모두 퇴색되어 꽃무늬가 있었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정금당(淨襟堂)」 현판[가로 113㎝, 세로 43㎝]은 테두리가 없다.
「유입암기(遊立巖記)」 편액[가로 99.3㎝, 세로 35.5㎝]은 남곡(南谷) 권해(權瑎)[1639∼1704]가 1679년(숙종 5)[상지오년(上之五年)]에 입암(立巖)을 방문한 후 지은 글이다. 현판의 테두리는 단청 바탕에 꽃과 구름을 그려 놓았으며, 글씨는 부분적 훼손이 있다.
[특징]
선암 서원 경내에 있는 18점의 현판은 각기 다른 장소에 보관되거나, 걸려 있다. 장판각에는 순상(巡相)이 지은 「경차」 시판 2점과 「국기판」, 운문댐 건설로 수몰된 보원재의 현판, 정도성이 지은 「봉차」 시판, 훼철 이전에 사용되었던 「선암 서원」 현판, 정관검이 글을 쓴 「소요대」 현판, 「숭경사」 현판, 「쌍청루」 현판, 「정금당」 현판 등이 보관되어 있다.
강당인 선암 서당에는 군수 이경이 지은 「경차」 시판과 「선암서당」 현판, 미수 허목이 전서체로 쓴 「소요당」 현판, 박재형이 지은 「소요당기」, 산남도 순사 이근필이 글을 쓴 「소요정중건기」, 후손 박성묵이 글을 쓴 「소요정중창실기」, 후학 권해가 글을 쓴 「유입암기」가 걸려 있다
이 외에 득월정에는 「득월정(得月亭)」 현판이 걸려 있다. 이처럼 1868년 선암 서원이 훼철된 후 당시 건물에 걸려 있던 현판들이 지금까지 보전되어 오고 있으며, 지방관들이 남긴 시판이나 기문이 많은 것으로 보아서 선암 서원의 지역 내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선암 서원 소장 현판 은 서원 건물의 역사를 확인시켜주는 자료로서 일정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지방관 및 당대 명유들의 글을 통해 선암 서원의 위상이 청도뿐만 아니라 영남 내에서도 높았음을 짐작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