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7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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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淸道雲門寺雪松大師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89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인표 |
건립 시기/일시 | 1754년 - 청도 운문사 설송대사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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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18년 7월 16일 - 청도 운문사 설송대사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61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청도 운문사 설송대사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
현 소재지 | 청도 운문사 설송대사비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89 |
성격 | 기념비 |
양식 | 비석 |
관련 인물 | 설송 대사 |
재질 | 석재 |
크기(높이,너비,두께) | 190㎝[높이]|87㎝[너비]|33㎝[두께] |
소유자 | 운문사 |
관리자 | 운문사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운문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비석.
[개설]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89 운문사 경내에 있는 비석이다. 설송 대사를 기리는 비석으로 설송 대사의 제자인 남붕(南鵬) 등이 1754년(영조 30)에 건립하였다. 모양은 비 몸체의 윗부분이 둥근 호패 모양 비석으로, 네모 모양의 비 받침 위에 고정되어 있다.
[건립 경위]
조선 후기 청도 운문사에 머물면서 휴정의 두 계보를 하나로 통합한 설송 대사를 기리기 위하여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1754년(영조 30) 청도 운문사에 건립하였다. 비문을 지은이는 이천보(李天輔)이고, 해서체의 글씨는 이정보(李鼎輔)가 썼으며, 이익보(李益輔)가 전액(篆額)하였다.
[위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89 운문사 경내에 있다. 운문사 일주문 안 좌측에 있는 3개의 비각 중 가운데에 설송대사비가 있다.
[형태]
비 몸체의 윗부분이 둥근 호패 모양 비석으로 네모 모양의 비 받침 위에 고정되어 있다. 비석의 규모는 높이 190㎝, 너비 87㎝, 두께 33㎝이다. 비 몸체의 윗부분에 가로로 ‘설송대사비(雪松大師碑)’를 전자체(篆字體)로 음각하고, 아래에 세로로 비문을 새겨 넣었다. 비 몸체의 뒷면에는 설송 대사의 제자들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금석문]
비문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부분은 서문에 해당하는데 비문을 지은이의 조상대부터 4대에 걸쳐 휴정의 법맥을 이은 승려들의 비문을 지었음을 밝히고, 자신이 설송 대사의 제자인 남붕(南鵬) 등의 요청으로 비문을 짓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휴정의 문도가 유정(惟政), 응상(應祥), 쌍언(雙彦), 석제(釋霽)의 교파(敎派)와 언기(彦機), 의심(義諶), 설제(雪霽), 지안(志安)의 선파(禪派) 등 두 파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설송 대사가 석제(釋霽)와 지안(志安)을 스승으로 삼음으로써 하나로 통합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두 번째 부분은 설송 대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설송 대사의 속성(俗姓)은 백씨(白氏)이고 호는 설송(雪松)이며, 자인현(慈仁縣)에서 태어나 속세 나이 13세 때 운문사에 출가를 하였다. 불경을 두루 보면서 근원을 찾고 묘법을 궁구하여, 단에 올라 강설하니 따르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종사(宗師)로 여겼다. 나이가 들면서 홀로 면벽하였으며, 1750년(영조 26) 게송(偈頌)을 써서 부처를 칭송한 뒤 세상을 떠났다. 나이는 75세이고, 승려로 산 지는 63년이었다. 화장을 한 뒤 사리 8개를 얻어 운문사(雲門寺)와 통도사(通度寺)에 나누어 간직하였다. 세 번째 부분은 설송 대사의 행적을 시로 적은 명(銘)이다. 뒷면에는 설송 대사 제자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현황]
운문사 승려들이 관리하고 있고, 비각이 있어 관리 상태가 매우 좋다. 2018년 7월 16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6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대표적인 승려 중의 한 사람인 휴정의 법맥은 교(敎), 선(禪) 두 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설송 대사가 두 파의 법맥을 함께 이음으로써 휴정의 두 법맥을 하나로 통합한 사실을 전하고 있어 조선 후기 불교계의 동향을 전해주는 자료로 사료적 가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