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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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益圭立案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정의]
1698년 청도군에서 발급한 노비 소송에 대한 결송 입안.
[개설]
「이익규 입안(李益圭 立案)」은 경상도 청도군 소재의 노비 소유 분쟁을 판결한 뒤, 승소한 유학(幼學) 이익규(李益圭)[1625∼1706]에게 1698년(숙종 24) 1월 발급해 준 청도군의 최종 판결문인 결송 입안(決訟立案)으로, 2013년 현재 경주 독락당에 소장되어 있다.
[제작 발급 경위]
「이익규 입안」은 소송에서 승소한 이익규에게 발급되었는데, 소송이 발생한 경위와 도중에 작성된 여러 문서의 내용들도 등서(謄書)되어 있다.
소송은 이익규와 경상도 의흥현(義興縣)[지금의 대구광역시 군위군 의흥면 일대]에 거주하는 홍유구(洪有九) 간의 노비 소유 문제로 발생하였다. 당시 청도군에는 이익규 소유의 노(奴) 종원(終元)이 살고 있었는데, 이익규의 현조(顯祖) 이언적(李彦迪)[1491∼1553] 때부터 종원의 선계들이 청도군에 거주하며 주인인 이익규 가문에 신공(身貢)을 바치고 사환(使喚)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종원은 양인이었던 일춘(日春)을 아내로 맞이하여 5명의 소생[이 중 1명은 소송 당시 사망]을 두었다. 그 소생들은 모친이 양인이고, 부친이 노비이면 부친의 신분을 이어 받고 부친 주인의 소유가 된다는 원칙을 따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697년 홍유구는 도망친 노비를 추쇄하였는데, 종원의 처 일춘이 그 대상이었다. 홍유구의 주장에 따르면, 원래 자신 집안에 향춘(香春)이라는 비(婢)가 있었는데 지난 계사년(癸巳年), 즉 임진왜란 중인 1593년에 청도군으로 도망쳤다는 것이다. 향춘은 청도군에서 양인 남성과 혼인하였고, 소생의 딸과 외손녀 모두 양인 남성과 혼인한 상황이었다. 일춘이 바로 향춘의 외손녀이었다. 홍유구의 추쇄로 일춘은 종원의 양인 처가 아니라 외조모의 신분을 따라 노비가 되며, 양친이 모두 노비이면 모친의 주인에게 소생들이 소유된다는 조선 시대 법칙에 따라, 종원의 소생들은 모두 홍유구에게 신공을 바쳐야 되었다.
추쇄한 이후 홍유구는 노비 명단인 화명(花名)을 작성한 뒤 그 소유권을 행사하려 했는데, 이때 이러한 사실이 이익규에게 알려진 것이다. 이익규는 즉시 그 부당함을 주장하는 소장을 노비가 거주하고 있던 청도군의 수령에게 올렸다. 하지만 청도 군수는 사안이 복잡한 관계로 즉시 판결을 내리지 않았기에, 이익규는 다시 상급 관아인 경상도 감영(慶尙道 監營)에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의송(議送)을 올리게 되었다.
감영은 청도 군수에게 엄밀하게 조사해서 처리할 것을 명하였고, 이에 청도 군수는 이익규와 홍유구 양측의 초사(招辭)를 받았다. 사건의 전후 과정을 확인한 관은 이익규의 손을 들어 주었다. 승소의 이유는 비록 도망간 노비라 할지라도 당사자가 아니고, 도망친 지 60년이 지난 노비라면 관청에서 들어 주지 말라는 경교(京敎)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이익규의 노비 소유를 그대로 인정하고, 위의 소송 과정을 정리한 결송 입안을 이듬해인 1698년 1월 청도군에서 이익규에게 발급하게 되었다.
[형태]
1매로 가로 565㎝, 세로 29㎝로 한자와 이두를 병용하여 기록하였다. 65개의 관서 인장과 청도 군수의 서압(署押) 하나가 확인된다.
[구성/내용]
「이익규 입안」에는 소송 과정에서 작성된 다른 문서들이 등서 및 요약되어 있다. 먼저 홍유구가 노비 소유를 주장하는 데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며 이익규가 경상도 관찰사에게 올린 의송, 청도 군수에게 엄밀히 조사하라고 판결한 관찰사의 제음(題音), 이익규 측과 홍유구 측의 초사, 이익규의 노비 소유를 그대로 인정하는 판결문, 마지막으로 노 종원과 양처(良妻) 일춘 소생의 이름과 나이를 기재해 놓았다.
[의의와 평가]
17세기 사족들의 중요한 경제 기반이었던 노비 소유 관계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17세기는 전란 후 광범위하게 늘어난 도망 노비에 대한 추쇄가 큰 사회적 문제가 되던 시기였다. 「이익규 입안」은 복잡하게 얽힌 노비 소유 관계를 보여 주어 17세기 사회적 현상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