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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청도현 어의궁 절수 둔전 타량 성책』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843
한자 慶尙道淸道縣於義宮折受屯田打量成冊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편찬 시기/일시 1688년연표보기 - 『경상도 청도현 어의궁 절수 둔전 타량 성책』 편찬
소장처 서울 대학교 규장각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산56-1
성격 양안
편자 청도현
권책 1책
행자 행자수부정
규격 34.6㎝[가로]|22㎝[세로]
권수제 강희 27년 7월 일

[정의]

1688년 경상도 청도현 상동면 대천원의 어의궁 둔전에 대한 양안.

[저자]

경상도 청도현에서 작성하였다.

[편찬/간행 경위]

어의궁(於義宮)은 당시 국왕이었던 숙종의 증조부인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머물렀던 잠저(潛邸)이다. 어의궁과 같은 궁실 및 궁가, 즉 궁방(宮房)에는 왕실·왕족·왕비족 등의 소요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면세지인 궁방전이 지급되고 있었다. 어의궁도 전국 각지에 궁방전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17세기 후반 경상도 청도현 상동면(上東面)[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상동면] 대천원(大川員)에 위치한 궁방전도 그 중 하나이다. 대천원의 궁방전은 둔전(屯田)으로 절수(折受)된 것이다. 또한 이전에 주인이 없던 구진(舊陳), 즉 황무지를 개간하여 둔전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청도현이 『경상도 청도현 어의궁 절수 둔전 타량 성책(慶尙道 淸道縣 於義宮 折受 屯田 打量 成冊)』을 엮은 명확한 사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고을 내에 면세지였던 궁방전이 있었던 만큼, 정확한 수세를 위해 전답의 소유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에 궁방전이 절수한 대천원의 전답을 파악하여 『경상도 청도현 어의궁 절수 둔전 타량 성책』이라는 책자로 엮은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서지]

1책 2장의 필사본이며, 크기는 가로 34.6㎝, 세로 22㎝이다. 본문에는 ‘청도현인(淸道縣印)’이라는 인장과 청도 현감의 서압(署押)이 확인된다.

[구성/내용]

본문에는 지번, 양전 방향, 토지 등급, 지목(地目), 지형, 장광척(長廣尺), 결부수(結負數) 등 일반적인 토지의 상황을 기재해 놓았다. 어의궁이 둔전으로 절수해서 보유하고 있던 대천원의 지목은 모두 ‘전(田)’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등급은 4·5·6등으로 나타나 있다. 기주란(起主欄)에는 모두 ‘구진 무주(舊陳無主)’, 즉 주인 없이 묵혀 있던 땅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대천원에 있던 어의궁 둔전의 전결수는 총 1결(結) 7속(束)으로 나타난다.

[의의와 평가]

『경상도 청도현 어의궁 절수 둔전 타량 성책』은 17세기 후반 궁방전의 토지 소유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 전기까지 궁방에는 직전(職田)이 지급되었으나, 조선 중기부터 직전제가 유명무실해져 궁방전으로 대체되었다. 각 궁방들은 전국에 있는 주인 없는 황무지를 개간한 뒤 토지를 절수 받음으로써 궁방의 소요 경비로 충당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형태는 17세기 이후로 널리 확산되는 추세였다. 하지만 양전(量田) 사업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던 허점을 활용하여, 특정인이 이미 개간한 주인 있는 전답임에도 불구하고, ‘구진 무주’로 절수 받아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비록 대천원 둔전의 정확한 전후 소유 관계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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