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4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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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甲子士禍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홍갑 |
[정의]
1504년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의 복위 문제를 둘러싸고 훈구파와 사림파가 탄압을 받은 사건.
[개설]
갑자사화 는 1504년(연산군 10)[갑자년]에 훈구파와 사림파 중심의 부중(府中)으로 세력이 궁중(宮中) 세력에게 받은 정치적인 탄압 사건이다.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위 사건과 사사 사건을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연산군이 알게 되면서 촉발되었으나, 조정 신하들 간의 암투로 격화되어 많은 인물들이 희생되었다. 이후 연산군의 폭정이 극에 달하였다.
[역사적 배경]
연산군의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궁핍하게 되어 조정에서는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한편, 공신들에게 나눠 준 공신전(功臣田)과 노비까지도 몰수하려 하였다. 이런 상황 아래 신하들은 궁중 세력과 부중(府中) 세력으로 갈라져 서로 반목하였다. 이때 임사홍은 연산군비 신씨의 오빠 신수근(愼守勤)과 손을 잡고 부중 세력인 훈구파와 무오사화 때 살아남은 신진 사림까지 일소하기 위해 옥사(獄事)를 꾸몄다.
[경과]
연산군은 어머니 윤씨가 왕비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폐비되었다가 사사(賜死)된 사실을 임사홍의 밀고로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사건에 관련된 성종(成宗)의 후궁 엄(嚴)·정(鄭) 두 숙의(淑儀)를 궁중 뜰에서 죽이고, 그들의 아들들을 귀양을 보낸 뒤 사사하였다. 이후 폐비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찾아내어 죄를 물었는데,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성준(成俊)·이세좌(李世佐)·권주(權柱)·김굉필(金宏弼)·이주(李胄) 등 10여 명이 사형되었고, 이미 죽은 한치형(韓致亨)·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 등 여러 인물들도 부관참시를 당했다. 무오사화 때 유배를 보낸 청도 출신의 선비 박한주(朴漢柱)[1459∼1504]와 이주[1468∼1504] 두 사람은 적소인 벽동과 진도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어 참형을 당하였다.
[결과]
궁중 세력이 정권을 잡아 신진 사림 세력은 더욱 위축되었다. 특히 성종 때 배출된 많은 사림들이 수난을 당했기에 도학 정치가 침체하고 학문 또한 크게 위축되었다. 청도 지역에서는 선비들이 크게 화를 입자 글 읽는 소리가 끊겼다 할 정도였다.
연산군의 폭정과 만행 또한 극에 달해 성균관과 사원(寺院)을 유흥장으로 만들고, 훈민정음의 교습 및 사용을 금하는 한편, 한글 서적을 모아 불사르는 등 문화의 정체와 인륜 질서의 파괴를 가져왔다. 이러한 연산군의 실정은 새로운 정치 변동과 정치 문화를 요청하게 되었고, 마침내 중종반정(中宗反正)[1506]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청도가 배출한 김대유(金大有), 박하담(朴河淡), 박하징(朴河澄) 등과 같은 처사형 학자들이 다수 배출된 것도 연속되는 사화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중종반정 이후 김대유는 현량과에 급제하여 중앙 정계로 진출하였지만, 박하담과 박하징 형제는 끝내 출사를 포기하고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보급하는 등 청도 고을의 성리학적 문화를 한 단계 격상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