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만화정 소장 현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554
한자 萬和亭所藏懸板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7-1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장처 만화정 -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182-1지도보기
성격 현판
재질 나무
소유자 만화정[박성욱]
관리자 만화정[박성욱]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에 있는 만화정에 걸려 있는 현판.

[개설]

만화정박하담의 12대손으로 통정대부, 좌승지에 오른 운강(雲岡) 박시묵(朴時黙)[1814∼1879]이 1856년 건립하여 강론하던 정자이다. 동창천 언덕에 서남향으로 지었으며, 정자 옆에는 세심정이 나란히 서 있다.

평면 구성은 마루를 중심으로 서쪽에 방 1칸, 동쪽에 2칸의 통방을 배치하고 누마루에는 3면에 헌함을 돌려 바닥을 확장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승만 전 대통령이 숙식했던 곳이기도 하다.

만화정의 명칭 유래를 보면, 운문 들녘의 이름이 만화평(萬花平)인데, 박시묵은 정자가 만화평을 굽어보는 점을 감안하여 화(花)를 화(和)자로 바꾸어 만화정(萬和亭)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화(和)의 뜻은 『중용(中庸)』에서 ‘중(中)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和)는 천하에 통용되는 도(道)’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즉 중화(中和)의 도리에 근본을 두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화(和)의 강조는 박시묵만화정을 건립 후 지은 「주옹만영(主翁謾詠)」이라는 시에서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다. 이 시에서는 박시묵이 조선 말 혼란하고 치열했던 시기에 오직 화(和)로 일관하여 저술과 교육, 우국과 계몽으로 일생을 보낸 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형태]

만화정에 소장된 현판은 모두 25점이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만화정의 정문(正門)은 ‘유도문(由道門)’인데, 이는 ‘도(道)를 근본(根本)으로 한다.’라는 뜻이다. 문의 처마 끝에 「유도문(由道門)」[가로 62.4㎝, 세로 38㎝]이라는 편액을 달았고, 그 아래에는 아들 박재형(朴在馨)이 지은 「유도문 중수기(由道門 重修記)」[가로 45.8㎝, 세로 28㎝]가 달려 있다. 유도문 편액의 테두리는 푸른 소나무를 그려 놓았다.

유도문을 지나 사랑채인 만화정 돌계단을 올라 축대에 오르면 강당 정면 위에 「만화정(萬和亭)」[가로 69.2㎝, 세로 38㎝]이란 현판이 하얀 바탕에 푸른색의 글씨로 새겨 놓았다.

강당 내부에는 둘러가며 편액들이 들보에 걸려 있다. 이들 현판들은 대부분 꽃이나 새, 나무들의 그림을 넣어서 화려하게 꾸며 놓았다. 「주옹만영(主翁謾詠)」[가로 52㎝, 세로 26.7㎝] 편액은 박시묵이 지은 시(詩)를 새긴 것으로 검은 바탕에 흰 글자로 쓰여 졌는데 부분 훼손이 심한 편이다.

「만화정 중수 소지(萬和亭 重修 小識)」[가로 53.4㎝, 세로 25.8㎝]는 박시묵의 증손자인 박순병이 1905년 만화정을 중수한 후에 그 사실을 1923년[계해 9월]에 기록한 것이다. 테두리는 직사각형에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1813∼1872]이 지은 「만화정기(萬和亭記)」[가로 81㎝, 세로 40.3㎝]는 편액의 좌측 하단에 낙관(落款)이 3개 있으며, 테두리는 구름과 부채, 박쥐 등이 그려져 있다.

성재(性齋) 허전(許傳)[1797∼1886]이 지은 「만화정기(萬和亭記)」[가로 80.7㎝, 세로 45.6㎝]는 테두리에 꽃과 나무가 그려져 있다.

「수복산회지익심만화정(水複山回地益深萬和亭)……」[가로 44.6㎝, 세로 23.2㎝] 편액은 족질(族姪) 박재철(朴在澈)이 지은 시(詩)를 새긴 것으로 테두리는 흰색 바탕에 국화와 코스모스가 그려져 있다.

「근차(謹次) 만화정(萬和亭)……」[가로 55.4㎝, 세로 28.2㎝] 편액은 장영석(張永奭)이 지은 시를 새긴 것으로, 테두리는 청색 바탕에 매화, 대나무, 모란, 난초로 꾸며져 있다.

「운문고사요상(雲門高士邀相)……」[가로 54.2㎝, 세로 35.5㎝] 편액은 절도사(節度使) 윤선응(尹善應)[1812∼?]이 지은 시를 옮긴 것으로 청색 바탕에 백매, 황매, 홍매로 꾸며져 있다.

「운담풍경록수(雲淡風經綠樹)……」[가로 55.8㎝, 세로 31.2㎝] 편액은 1890년 4월 10일에 청도 군수인 채경묵(蔡慶默)이 지은 시를 새긴 것으로 테두리는 엷은 갈색 바탕에 국화와 새로 꾸며져 있다.

「세심대기(洗心臺記)」[가로 56㎝, 세로 34㎝] 편액의 테두리는 당초문(唐草紋)으로 꾸며져 있다.

「근차(謹次)」[가로 48㎝, 세로 24㎝] 편액은 박정현(朴廷賢)이 지은 시를 새긴 것으로 글자들 사이에 흰색 계선(界線)이 있고 테두리는 파란색 바탕에 꽃과 나비로 꾸며져 있다.

「근차(謹次)」[가로 51.7㎝, 세로 23.3㎝] 편액은 족종(族從)인 박용우(朴龍友)가 쓴 시를 새긴 것으로 색이 많이 바랬지만, 테두리에 난초, 국화, 대나무가 꾸며져 있다.

청도 군수 김도근(金度根)의 시를 새긴 편액[가로 48.6㎝, 세로 32.5㎝]은 초서로 쓰여 있다. 테두리는 동백꽃과 박쥐들로 꾸며져 있다.

「일구천위초당안대야호(一區天爲草堂顔大野乎)…」[가로 55.3㎝, 세로 33㎝] 편액은 초사(蕉史) 홍건후(洪健厚)[1805∼?]가 1857년[정사(丁巳)] 2월[중춘(仲春)]에 지은 시를 새긴 것으로, 편액의 아래위가 반원 형태로 되어 있으며, 테두리는 갈색바탕에 대나무, 국화, 난초로 꾸며져 있다.

「임연당십영(臨淵堂十詠)」 편액[가로 71.3㎝, 세로 39.5㎝]은 망어기(忘魚磯), 우학대(友鶴臺), 광도벽(光道壁) 등의 시 10수가 적혀 있다. 시의 말미에 전서체의 붉은 글씨가 있으며, 테두리는 국화들로 꾸며져 있다.

「임연당시지(臨淵堂詩識)」 편액[가로 69.1㎝, 세로 42.4㎝]은 18세기 말의 인물인 만귀(晩歸) 이주현(李周賢)의 글을 새긴 것으로, 테두리는 국화와 당초문으로 꾸며져 있다.

「만화정기(萬和亭記)」 편액[가로 86.9㎝, 세로 39.2㎝]은 우인(友人)[친구]이라 칭한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가 지은 기문(記文)으로 당초문으로만 꾸며져 있다.

「경차(敬次)」 편액[가로 64㎝, 세로 33.9㎝]은 유치목(柳致睦)[1771∼1836]의 증손자 유영우(柳永佑)[1850∼1934]가 지은 시를 새긴 것이다. 테두리는 푸른색 바탕에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와 더불어 소나무로 꾸며져 있다.

「유거하필만산심지척정(幽㞐何必萬山深咫尺亭)……」 편액[가로 62.2㎝, 세로 28.2㎝]은 정헌(定軒) 이종상(李鍾祥)과 희암(希庵) 이우상(李瑀祥)의 시(詩)가 함께 실려 있다. 테두리는 국화와 난초와 나방으로 꾸며져 있다.

「용주농수봉비(龍珠弄水鳳飛)……」 편액[가로 53㎝, 세로 30.6㎝]은 1884년[병신(丙申)] 1월[조세(肇歲)] 10일에 청도 군수[지군(知郡)] 조병길(趙秉吉)의 시를 새긴 것이다. 시판(詩板)의 테두리는 이름 모를 꽃과 당초문으로 꾸며져 있다.

「도박아시묵즉궁경락지사야(道朴雅時默卽窮經樂之士也)……」 편액[가로 57.7㎝, 세로 30.2㎝]은 1864년[갑자(甲子)] 5월 10일에 완산후인(完山後人)[전주(全州)] 이인직(李寅稷)이 쓴 만화정에 대한 제영(題詠)이다. 현판의 테두리는 국화 무늬로 꾸며져 있다.

「조천요량(早淺要凉)…」 편액[가로 55.7㎝, 세로 27㎝]은 청도 군수[지군(知郡)] 박효헌(朴孝憲)의 시를 새긴 것으로, 시판(詩板)의 테두리는 꽃과 나비와 당초문으로 꾸며져 있다.

「산야원개동전(山野圓開洞轉)……」 편액[가로 78.8㎝, 세로 30.4㎝]은 1894년[갑오(甲午)] 1월 30일에 청도 군수[지군(知郡)] 신욱(申㮋)이 지은 시를 새긴 것이다. 시판의 테두리는 국화문으로 꾸며져 있다.

[특징]

만화정 소장 현판 들은 정자 내 대들보에 걸려 있다. 만화정운강 고택의 부속 건물로 박시묵이 1856년(철종 7)에 건립한 후 공부하며, 강론하던 곳이다. 그러므로 이곳에 있는 각종 현판들은 모두 1856년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화정에 걸려 있는 현판들 가운데에는 당대의 석학들로 이름난 만귀(晩歸) 이주현(李周賢),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 성재(性齋) 허전(許傳) 등의 기문(記文)들도 있다. 이 외에도 박시묵의 아들인 박재형만화정 진입문을 유도문(由道門)이라 명명한 데 대해 「유도문 중수기」를 남긴 것이 현판으로 걸려 있고, 박시묵의 증손자 박순병(朴淳炳)이 1905년 만화정을 중수한 후 지은 「만화정 중수 소지」 등이 현판으로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만화정의 건립과 관련한 기록은 박시묵이 지은 『만화정지(萬和亭誌)』[한국학 중앙 연구원 소장] 2책이 남아 있어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건립 이후의 방문객 및 중건 사실 등에 관한 기록은 산재(散在)되어 있기에 만화정에 걸린 현판을 통해 당시 교류 인사들의 면면과 중건 사실 등을 상세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