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8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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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固城李氏參判公派李鍾基所藏古文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예리리 84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작성 시기/일시 | 1832년 10월 - 이택락 등이 청도 군수에게 올리는 상서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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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시기/일시 | 1832년 10월 - 이택락 등이 경상도 관찰사에게 올리는 상서 작성 |
작성 시기/일시 | 1834년 7월 - 이택락 등이 청도 군수에게 올리는 상서 작성 |
작성 시기/일시 | 1834년 8월 - 이택락 등이 경상도 관찰사에게 올리는 상서 작성 |
발급 시기/일시 | 1822년 윤3월 - 이택준 증직 교지 발급 |
발급 시기/일시 | 1822년 윤3월 - 현풍 곽씨 증직 교지 발급 |
수급 시기/일시 | 1822년 윤3월 - 이택준 증직 교지 수급 |
수급 시기/일시 | 1822년 윤3월 - 현풍 곽씨 증직 교지 수급 |
수급 시기/일시 | 1832년 10월 - 이택락 등이 청도 군수에게 올리는 상서 수급 |
수급 시기/일시 | 1832년 10월 - 이택락 등이 경상도 관찰사에게 올리는 상서 수급 |
수급 시기/일시 | 1834년 7월 - 이택락 등이 청도 군수에게 올리는 상서 수급 |
수급 시기/일시 | 1834년 8월 - 이택락 등이 경상도 관찰사에게 올리는 상서 수급 |
성격 | 고문서 |
관련 인물 | 이택준|현풍 곽씨 |
용도 | 증직|청원 |
발급자 | 국왕[교지]|이택락 등[상서] |
수급자 | 이택준[교지]|현풍 곽씨[교지]|청도 군수[상서]|경상도 관찰사[상서] |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예리리에 거주하는 이종기가 소장한 조선 후기 고문서.
[개설]
고성 이씨 참판공파 이종기 소장 고문서(固城 李氏 參判公派 李鍾基 所藏 古文書) 는 조선 시대 경상도 청도군의 대표적인 재지 사족 가문인 고성 이씨(固城李氏) 참판공파(參判公派) 후손 가운데 효행으로 이름을 떨친 이택준(李宅俊)[1793∼1815]과 그 처 현풍 곽씨(玄風 郭氏)의 효열을 추숭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것이다. 1822년(순조 22) 이택준과 현풍 곽씨에게 발급된 교지(敎旨) 2점, 1832년과 1834년 이택준의 동생 이택락(李宅洛) 등이 청도 군수와 경상도 관찰사에게 올린 상서(上書) 4점이 이종기(李種基)의 자택에 전해지고 있다.
[제작 발급 경위]
효성이 뛰어난 이택준은 상사(喪事)가 있고 장례를 마친 후에도, 큰 하천을 건너 수삼 리 떨어진 묘소를 매일 찾아가 성묘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큰 비로 하천이 불어 건너지 못하게 되어 통곡하니, 물길 가운데가 끊겨 하천을 건너 성묘할 수 있었다는 일화를 남겼고, 이에 이웃 사람들이 이택준의 효성에 감복한 것이라 칭송하였다. 그 결과 1822년 3월 11일 서울과 지방에서 보고한 충·효·열을 예조에서 수합하여 정부에 초계(抄啓)하였는데, 이택준은 그 중에서도 ‘효자 증직질(孝子贈職秩)’에 포함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달인 윤 3월 효행이 인정되어 증동몽교관 조봉대부(贈童蒙敎官 朝奉大夫)를 증직(贈職)하는 교지를 받게 된다.
이택준의 처 현풍 곽씨는 같은 시기 열부로 추숭을 받았다. 현풍 곽씨는 이택준이 1815년 세상을 떠나자 상례에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하지만 비통함을 참지 못해 상복을 벗자 바로 지아비를 따라 세상을 떠났고, 이에 정려를 받게 된다. 지아비 이택준과 더불어 1822년 예조 초계의 ‘열녀 정려질(烈女旌閭秩)’에 포함되었으며, 이택준과 같은 날 영인(令人)으로 증직되는 교지를 받았다.
상서 4점은 1832년 편찬된 『경상도 읍지(慶尙道邑誌)』 청도군 편의 ‘열부(烈婦)’ 조에 영인으로 증직된 현풍 곽씨가 누락된 문제 때문에 작성된 것이다.
[형태]
고문서 6점 모두 각각 1매로 작성되었다. 크기는 1832년 윤 3월의 이택준 교지가 가로 98㎝, 세로 68㎝이고, 1832년 현풍 곽씨의 교지가 가로 97㎝, 세로 67㎝이다. 이택락과 이택구(李宅龜)가 1832년 10월 청도 군수한테 올린 상서는 가로 49㎝, 세로88㎝이며, 1832년 10월 경상도 관찰사한테 올린 상서는 가로 60㎝, 세로 108㎝이다. 1834년 7월 청도 군수한테 올린 상서는 가로 98㎝, 세로 100㎝이고, 1834년 8월 경상도 관찰사에게 올린 상서는 가로 56㎝, 세로 107㎝이다.
[구성/내용]
1832년 윤 3월 학생(學生) 이택준에게 발급된 교지는 효행이 뛰어나 동몽교관 조봉대부로 증직하는 교지이다. 1832년 윤 3월 유인(孺人) 현풍 곽씨에게 발급된 교지는 효행 때문에 증직된 지아비 이택준을 따라 법전에 의거 영인으로 증직한다는 교지이다.
1832년 10월 이택준의 동생 이택락 등이 청도 군수에게 올린 상서는 『경상도 읍지』 청도군 편의 ‘열부(烈婦)’ 조에 누락된 형수의 등재를 청원하는 상서이다. 『경상도 읍지』가 새롭게 증보될 때 추가 등재를 청하였다. 1832년 10월 경상도 관찰사에게 올린 상서 역시 같은 내용이다. 1834년 7월 청도 군수, 같은 해 8월 경상도 관찰사에게 올린 상서는 1832년의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택락과 이택구 등이 다시 올린 것이다.
[의의와 평가]
19세기 성리학적 윤리 규범이 정착되면서 충신과 효자, 열녀에 대한 추숭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던 사회상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