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841 |
---|---|
한자 | 淸道郡華山齋通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병훈 |
저술 시기/일시 | 1926년 11월 21일 - 「청도군 화산재 통장」 작성 |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2006년 2월 - 경상 대학교 문천각에 「청도군 화산재 통장」 기증 |
소장처 | 경상 대학교 문천각 - 경상남도 진주시 가좌동 900 |
간행처 | 화산재 -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금곡리 |
발견|발굴처 | 박상호 -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청광리 박진사 댁 |
성격 | 통장 |
저자 | 화산재 |
편자 | 화산재 |
간행자 | 화산재 |
권책 | 1장 |
행자 | 23행 자수부정 |
[정의]
1926년 경상북도 청도군 화산재 건립을 위해 밀양 박씨 문중에서 만든 통장.
[개설]
「청도군 화산재 통장(淸道郡 華山齋 通狀)」은 밀양 박씨의 선조 판사재감사 박응(朴膺)과 창신 교위 박겸형(朴謙亨)의 묘소를 제향하기 위한 재사 ‘화산재(華山齋)’를 짓기 위해 족인들에게 자금을 조달을 요청하는 통장이다.
[제작 발급 경위]
청도군 풍각면에 있는 화산(華山)에는 밀양 박씨의 선조 판사재감사 박응과 창신 교위 박겸형의 묘소가 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들을 제향하는 재숙(齋宿)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이에 족형(族兄)들이 공의로 화산 아래에 사가(四架) 초옥[초가]과 1두락의 논을 매득하여 재숙을 세울 계획을 세웠다. 합리적인 가격에 논과 집을 사기로 결정하였지만, 비용이 모자라서 후일을 기약하였다. 혹시 매입을 하더라도 수리 비용과 제사 비용을 장만할 방안이 없었기에 전국에 살고 있는 족인(族人)들에게 십시일반으로 자금을 조달받기 위하여 이 통장을 지은 것이다.
1928년의 『화산재기』에 따르면 화산재의 건립은 1926년 족형 몇몇의 발의로 ‘화산재(華山齋)’라 이름 짓고 일을 추진하였지만, 실제로는 자금난으로 기문이 작성된 1928년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형태]
1장으로 되어 있는 낱장 고문서이다. 문서명은 ‘청도군 화산재 통장(淸道郡華山齋通狀)’으로 되어 있다. 통장은 통문과 마찬가지로 사실의 전달과 의견을 모으기 위하여 발의한 것으로, 「청도군 화산재 통장」에는 부분적으로 글을 수정한 흔적이 있다. 특히 연도는 ‘정묘(丁卯)[1927년] 9월’로 되어 있던 것을 ‘병인(丙寅)[1926년] 11월 21일’로 고쳤다. 이외에도 글자의 정밀함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서 초본으로 짐작된다.
[구성/내용]
「청도군 화산재 통장」은 1926년 11월 21일에 경향 각 군에 살고 있는 가족들에게 재실 건립과 위토(位土) 매입에 필요한 자금을 성심껏 지원해 주길 바란다는 내용으로 작성되었다. 실제로 건물과 토지를 매입하고 수리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몇몇 후손들만으로 일을 추진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렇기에 19세기 이후로 문중 서원이나 사우 건립을 위해 각 지역의 교원(校院)과 문중에 부조를 요청하는 통문 등을 보내 자금을 마련하는 사례는 많이 보이고 있다.
「청도군 화산재 통장」에서도 매득하기로 이야기를 마친 초가와 논의 비용을 제때 지불하지도 못하여 후일을 기약한 상태인 데다가, 앞으로 집을 수리할 비용조차 없으며, 제사를 위한 위토도 확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족인들이 각자 손해를 감수하고 출자하여 오랜 세월 미뤄 오던 염원을 이룰 수 있도록 협조를 당부하고 있었다.
[의의와 평가]
1926년 화산재의 건립을 발의한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화산재의 건립 과정에 있었던 일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