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20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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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山鶴里旗告祀 |
영어의미역 | Sacrificial Rite for the Farming Flag of Sanhak-ri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산학리 |
집필자 | 구중회 |
성격 | 기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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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시기/일시 | 음력 1월 15일 |
의례장소 |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산학리 |
신당/신체 | 기(旗)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산학리에서 정월 대보름날 농기에 제를 올려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민속 의례.
[개설]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산학리는 1923년 간행된 『공산지(公山誌)』천(天)에 의하면, 장척면(長尺面)의 효제동(孝悌洞), 송학리(松鶴里), 소학리(巢鶴里), 학림동(鶴林洞), 산학리(山鶴里), 행정리(杏亭里), 중산리(中山里), 우산리(牛山里) 각 일부를 묶어서 편성된 방리(坊里)이다.
1789년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서 위와 관련된 지역은 장척동면(長尺洞面)의 효재동(孝齋洞)·송계(松溪)·명학동(鳴鶴洞)·중산리·우산리 등과 목동면(木洞面)의 학서리(鶴棲里)·학소동(鶴巢洞)·신학동(新鶴洞) 등이 있다. 참고로 효제동(孝悌洞)은 원래 효재동(孝齋洞) 혹은 효재동리(孝齋洞里)인데, 일제강점기부터 효제동(孝悌洞)으로 바뀌었다.
산학리(山鶴里) 지역에는 유달리 학과 관련된 지명이 많았다. 명학리·학서리·신학동 등의 옛날 지명은 물론이고 현재에도 비학(飛鶴)실이 있다. 비학실은 달리 미학실·송학동·비학동·미학동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형이 마치 학이 나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비학실 지명과 관련한 이야기로 예전에 한 농부가 살았으며, 그 농부는 가난하여 초근목피로 연명했다고 한다. 산에서 나물을 캐다가 다리를 다쳐서 날지 못하는 학을 만났으며, 학을 치료하여 날려 보냈다. 며칠 뒤 허기져서 기진맥진해 있을 때 입에 쌀을 문 학 떼가 몰려와 구해주었다. 이후 똑같은 일이 생겨서 농부는 식량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학이 쌀을 물고 다닌 곳이라는 의미로 지명이 미학(米鶴)실인데 비학실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신당/신체의 형태]
산학리 기고사에 쓰이는 농기(農旗)에는 명문으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쓰여 있다. 기고사가 끝나고 20여 일간 그대로 두며, 이런 기간을 두어야 농기에 깃든 신령이 실컷 잡술 수 있다고 주민들은 여겼다.
[절차]
기고사는 일 년에 두 번 지내는 것이 보통이다. 정월 대보름과 여름 두레 때이다. 정월 대보름날은 장밭들을 중심으로 이른 아침에 기고사를 지낸다. 주민들은 ‘기고사 잡숫는다.’라고 표현한다. 정월 대보름 기고사는 한 해 동안 마을이 편안하고 농사도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낸다.
기고사를 지내기 열흘 전에 유사를 선출한다. 그리고 집 대문의 상기둥에 기를 매달아 세운다. 유사는 고사 일까지 부정이 없도록 하지만, 만약 마을에 초상이 나면 이월 보름날에 지낸다. 소요 경비는 고사 닷새 전에 집집이 걸립하며, 제물은 팥시루떡·북어포 두 마리·삼색실과·술 등을 준비한다. 기고사는 새벽 5시경에 시작하며, 거기에는 부정이 없는 모든 주민이 참석한다.
먼저 기 앞에 자리를 펴고 제물을 진설한다. 고사는 분향·재배·소지의 순이다. 축(祝)은 읽지 않는다. 소지의 순서는 유사와 이장·반장·새마을 지도자·참석자·참석하지 못한 사람 등이다. 고사가 끝나면 명태 한 마리와 떡 따위의 제물을 조금씩 떼어 소지 종이에 싸서 기에 꽂아 놓는다. 그리고 이장과 새마을 지도자, 마을 유지들이 각기 절을 올린다. 그다음 유사 집에 모여 음복하며 풍물놀이를 하며 하루를 즐긴다.
여름 두레기고사는 여름 두레 먹는 날 그 장소에서 기를 세워 놓고 지낸다. 두레기고사에는 본기 이외에도 영기(令旗)가 참여한다. 제수는 기본적으로 북어 한 마리이고 제의 절차도 술 한 잔을 올리는 것이다. 제관은 보통 좌상이고 집사는 공방이나 총각좌상이 맡았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 석 되 세 홉의 쌀과 소금만 넣은 흰무리를 진설하고 삼헌(三獻)을 올리기도 했다. 여름 두레기고사는 1960년대 이후 소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