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26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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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선사/선사 |
집필자 | 이남석 |
[개설]
선사시대에 강은 지리적으로는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고, 문화와 문화를 연결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금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넓은 충적평야와 낮고 완만한 구릉들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선사시대 이래로 생활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고, 이러한 금강을 따라 펼쳐진 선사 유적은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상을 보이고 있다.
금강 유역에서 조사된 선사 유적으로는 한강 이남에서 처음으로 구석기 유물이 발견된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을 비롯하여,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원삼국시대, 공주·부여 일대의 백제 유적, 그리고 이후 역사시대 유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온화한 사람들을 낳은 젖줄 금강]
금강(錦江)은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에서 발원하여 서해의 군산만으로 유입하는 우리나라 6대 하천의 하나이다. 상류는 전라북도의 장수·진안·무주와 충청북도 일부 지역의 물이 모아져 시작된다. 중·하류는 충청남도·충청북도의 지역으로 남동쪽에 소백산맥, 북서쪽에 차령산맥이 있다.
이처럼 금강은 전라북도·충청남도·충청북도의 넓은 지역을 아우르며 형성되어 있는데, 유역 면적은 9.885㎢이고 유로 연장은 401㎞로 남한에서는 한강·낙동강 다음으로 큰 강이다. 또한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인 호남평야와 논산평야의 쌀을 각 지방으로 수송하는 주요 수송로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수운의 가치로는 우리나라 여러 하천 중 으뜸이었다.
특히 충청도는 금강이 젖줄처럼 내륙 사이를 가로지르며 만들어 놓은 산지, 그 사이사이에 알맞게 발달한 평야 등 아름답고 살기 좋은 자연 조건을 갖추고 있어 홍수나 기근, 자연재해가 다른 지역에 비하여 적었다. 먹을 것이 많고 살기 좋은 땅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 여유로운 삶과 심성을 부여했다. 그리하여 지금도 충청도 사람하면 ‘순하고 온화한 사람들’, ‘정이 많은 사람들’로 통칭하는데 이견이 없다. 충청도 사람의 인성은 바로 풍요롭고 살기 좋은 자연 환경에서 배태된 것이다.
공주시는 시가지를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에 높은 산지가 있고, 시의 북쪽 중앙부를 지나는 금강 유역에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특히 금강은 공주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시가지를 가로 지르듯이 흐르는데, 많은 지류와 합류하면서 주변 지역에 저평한 구릉과 비옥한 범람원을 이루어 놓았다.
공주 지역을 지나는 금강은 본류(本流)에서 분지(分枝)된 하천 주변에 주로 충적지대가 형성되어 있는 반면, 부여·강경 지역에 이르러서는 금강의 본류 지역에 넓은 충적지대가 형성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그러나 금강이라는 큰 하천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하나의 동일한 유역권으로 설정이 가능하다.
[금강 유역의 선사 유적]
금강 유역에 형성된 문화는 시대별로 구석기·신석기·청동기시대의 선사 문화와 백제 문화, 그리고 고려·조선시대의 문화로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다. 특히 선사 문화는 금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일정한 문화권을 설정할 수 있을 정도로 밀집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금강 유역에서 조사된 유적으로는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 공주 장원리·청양 학암리 신석기시대 유적, 공주 귀산리·태봉동·장원리·산의리·안영리, 부여 송국리·합정리 유적, 청양 학암리 유적 등의 청동기시대 생활 유적이 있다. 청동기시대 분묘 유적으로는 송학리 석관묘·옹관묘, 산의리 석관묘·옹관묘, 분강·저석리 석관묘, 안영리 석관묘, 남산리 석개토광묘·석관묘·옹관묘, 송국리 석관묘·옹관묘 등이 다양하게 확인된다.
[금강 유역의 구석기시대 유적]
금강 유역은 구석기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중요한 생활 터전으로 자리 잡아 왔고, 삶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 조사된 유적은 남한에서 최초로 발굴 조사된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을 비롯하여 전북 진안 진그늘, 대전 둔산동·구즉동·용호동·노은동 유적 등이 있다. 이들 유적은 모두 구석기시대 중기 이후의 유적으로 긁개·새기개·슴베찌르개·좀돌날몸돌 등이 출토되었다. 유적의 형태도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에서 조사된 주거지를 제외하면 모두 한데유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금강 유역에 살았던 구석기인들이 석기 제작에 자주 사용하였던 돌감은 석영 또는 규암 종류이다. 이런 돌감은 구석기시대 이른 시기부터 늦은 시기에 걸쳐 나타나며, 중기·후기 구석기시대로 접어들면서 돌감의 변화가 보여 후기에는 유문암이나 흑요석과 같은 좋은 질의 돌감이 석기 제작에 쓰였다.
돌감은 석기 제작 기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시에 당시 구석기인들의 활동 영역을 살피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데, 석기 제작을 위한 돌감의 변화는 새로운 석기 제작 기술, 곧 간접떼기나 눌러떼기와 같은 수법과 더불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공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금강 유역에서 조사된 구석기시대 유적으로는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과 반포면 마암동굴이 알려져 있으나, 마암동굴은 구체적인 형적을 알 수 없다. 반면에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은 1964년 이후 지속적으로 조사된 것으로, 남한 지역에서 최초로 발견된 대규모 구석기 유적지로, 한국의 구석기 유적을 대표하는 곳 가운데 하나로 일찍부터 알려졌다.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에서는 구석기시대부터 중석기시대에 걸치는 문화층이 발굴된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전기 구석기시대(1-6문화층) 지층에서는 찍개·자르개·주먹도끼·긁개 등이 나왔다. 중기 구석기시대(7-9문화층)에서는 석기 제작 터와 함께 찌르개·찍개·긁개·주먹도끼 등이 나왔다. 후기 구석기시대(10-12문화층) 지층에서는 긁개·찌르개·좀돌날몸돌·뚜르개·새기개 등이 나왔다. 밀개와 새기개가 출토한 집자리의 절대 연대는 BP 20,830±1,880년으로 측정되었다. 이후 중석기시대 문화층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석장리 박물관이 건립되어 다양한 연구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금강 유역의 신석기시대 유적]
금강 유역의 신석기시대 유적들은 대체로 소규모의 분지 내에 하천변을 따라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어, 금강의 상·중·하류 지역으로 구분하여 살필 수 있다. 대부분이 산지 사이를 곡류하는 하천변의 충적지나 구릉지에 위치하는데, 이러한 입지의 선택은 금강 유역의 생계 경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금강 상류 지역에 위치하는 유적으로는 전라북도 진안 갈머리·진그늘과 충청북도 영동 금정리·원촌리, 옥천 안티·대촌리 유적 등이 있다. 이들 유적에서 ‘금강식 토기’(錦江式 土器)를 비롯하여 단사선문, 격자문, 변형종주어골문, 횡주어골문, 구연 아래 공백시문 등의 다양한 형태의 빗살무늬토기와 보습·갈판·석부 등의 석기가 출토되었다. 이들 유적은 공통적으로 신석기시대 후기의 특징을 보이나, 일부 유적에서는 신석기 중기와 말기의 양상이 보이고 있어 상류 지역 유적의 연대 폭이 점차 넓어지고 있다.
중류 지역에서 알려진 유적으로는 청원 쌍청리와 대전 둔산·상서동·송촌동 유적, 공주 장원리, 청양 학암리 등이 있다. 이중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쌍청리 유적과 둔산 유적은 금강식 토기를 특징으로 하여 토기 문양의 종류와 시문방식, 기형, 석기조성 등에서 거의 유사한 문화 양상을 보인다. ‘금강식 토기’는 쌍청리 유적 발굴 조사 후 지역성에 기초하여 설정된 토기 양식이다.
바닥이 원저이고 동체는 구형 또는 편구형이며 구연이 짧게 직립하거나 외반하는 호형의 토기로 미세한 요철이 있는 시문구로 연속 압인하여 토기의 상반부에 능형문을 시문한 형태이다. 금강식 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에서는 농경과 연관된 갈판과 갈돌·보습이 공반 출토되고 있다. 기형과 문양이 독특하고 공반되는 다른 빗살무늬토기 역시 지역별로 많은 차이가 있어 그 성립과 발달 과정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영남 내륙의 조우문토기(鳥羽文土器)가 금강 유역으로 확산되면서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금강의 하류에서는 서천 장암리 패총과 해안 도서의 가도·노래섬·비응도 등이 조사되었다. 가도패총에서는 영선동식토기·이중구연토기 등과 같은 남해안식 토기와 서해안의 전형적인 횡주어골문토기가 함께 출토되고 있다. 서천 장암리 유적도 가도유적과 매우 유사한 면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여러 지역의 문화가 복합되어 나타나는 금강 하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금강식 토기’로 대표되는 쌍청리 유적과 둔산 유적은 그 문화의 내용이 영남 내륙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곳이므로 영남 내륙 지역의 신석기시대 편년안으로 볼 때, 이들 유적은 신석기시대 후기 전엽으로 편년된다. 따라서 이를 기준으로 금강 유역의 다른 유적들의 시간적 위치를 살펴보면, 중상류 지역의 유적은 대체로 신석기시대 후기 전엽에서 만기에 이르는 특징을 보인다.
일부 유적에서 중기로 편년되는 단사선문과 횡주어골문이 출토되어 비교적 이른 시기의 양상이 보이기도 한다. 이들 지역에서 후기 단계 유적이 집중되는 것은 영남 내륙 문화가 금강 유역으로 확산된 결과이며, 그 배경에는 원시 농경을 동반한 생계 경제상의 변화를 상정할 수 있는데, 그 흔적으로 농경구로 추정되는 보습의 존재를 들 수 있다.
금강의 중상류 유적들은 신석기 후기 단계의 남해안 지역과 공통된 토기 문화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일부 서해안과의 관련성도 보이는데 이것은 지리적인 위치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하류의 해안 지대에서는 신석기 전기부터 만기에 이르는 각 시기에 해당하는 유적들이 확인되고 있으며, 이들 유적은 서해 중부 지역의 토기 문화도 지니고 있지만 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해 남해안 지역 토기 문화의 확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공주 지역에서 조사된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는 장원리 유물산포지 1곳이 있다. 정안면 장원리 유적에서 신석기시대 유물산포지가 조사되어, 빗살무늬토기편, 보습과 같은 석기가 출토되었다. 유물은 야산(野山)의 중상단에서 확인되었는데 주변에 구체적인 유구가 없는 것으로 볼 때, 당시 신석기인들의 생활 공간은 이 유물층보다 좀 더 위쪽의 야산 정상부에 인접한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그 동안 알려져 있는 신석기시대 유적은 대부분 강가의 낮은 저지대나 구릉상에 입지하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이었으며, 유구의 밀집도도 높지 않아 제한적인 지역에서만 주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금강 유역의 신석기 문화는 신석기 전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존속되었으며, 특히 내륙 지방에는 후기 단계에 들어와 유적의 밀도가 높아진다. 최근에 장원리 유적을 비롯하여 청양 학암리, 청원 쌍청리 유적 등 하천에 인접한 야산의 구릉정상에서도 신석기시대 유적이 조사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앞으로 주변 지역에서 신석기 유적이 지속적으로 조사될 가능성은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금강 유역의 청동기시대 유적]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매우 풍부하게 확인되었는데, 유적의 성격에 따라서 분묘·주거지·유물산포지·입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최근에는 분묘와 주거지, 유물산포지는 지속적으로 그 예가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는데, 이것은 지표면에서 확인되지 않았던 것이 구제 조사와 같은 발굴을 통하여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주거지의 경우 지표면에서는 전혀 흔적을 확인할 수 없어서 유물산포지로 분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추후에 구체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질 경우에만 유구의 형상을 확인할 수 있다는 조사상의 한계가 있다.
금강 유역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생활 유적과 분묘 유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생활 유적으로는 주로 주거 유적이 조사되고 있는데, 최근 농경과 관련된 유적 조사 사례가 증가되고 있다. 주거 유적은 주로 소하천 주변에 형성된 낮은 구릉에 입지해 있으며, 청동기시대 전기와 중기 이후에 조성된 유적으로 구분된다.
생활 유적은 최근에 가장 많이 확인된 것으로, 대전 궁동·구성동·둔산동, 공주 태봉, 장원리, 안영리 1·2·3, 산의리, 귀산리, 논산 마전리·원북리, 부여 송국리, 서천 오석리 유적 등이 있다. 이렇게 보고된 대부분의 유적은 구제 발굴 조사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주거지의 구조 형태가 지상의 구조물로 남아있기 어렵다는 특징, 그리고 별도의 시설 없이 지하에 수혈(竪穴)을 파서 조성하는 특성으로 인하여 우연한 기회에 확인될 가능성 또한 전혀 없다는 자료상의 한계 때문이다.
금강 유역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 주거 유적 가운데 전기로 분류되는 것은 대전 둔산동 유적·궁동 유적·노은동 유적·신대동 유적이 있는데, 공통적으로 주거지내에 돌을 돌려 만든 화덕과 팽이형 토기가 출토되었다. 중기 이후 유적으로는 진안의 여의곡 유적·농산 유적, 대전의 구성동 유적·궁동 유적·상서동 유적, 공주 태봉 유적·산의리 유적·안영리 유적·귀산리 유적·장원리 유적, 논산의 마전리 유적·원북리 유적, 서천의 오석리 유적·당정리 유적·한성리 유적 등이 있다.
중기 이후의 유적은 대부분 원형 주거지와 외반구연의 토기, 삼각형석도, 유구석부가 출토되는 송국리형 문화단계상을 보인다. 다만 대전 궁동 유적의 경우 청동기시대 중기 문화적 요소와 후기 문화적 요소인 점토대토기가 함께 출토되어 청동기시대 중기 문화의 발전과 점토대토기문화의 출현과 변천 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주거 유적 외의 생활 유적으로는 논산 마전리의 수전, 진안 여의곡의 밭과 같은 농경 유적, 논산 마전리의 우물, 진안 여의곡의 길[道]을 들 수 있다.
특히 공주 지역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 주거 유적의 경우 대부분 중기 이후의 송국리형 문화상을 보이는 것들이다. 그리고 유적의 입지상 특징으로는 금강이라는 큰 강줄기를 중심으로 주변에 형성되어 있는 지류에 인접한 구릉에 입지하는 특징을 보인다. 지형 상으로도 그다지 높지 않은 구릉에 위치하며, 주거지의 밀집 정도도 높지 않아 3~5기 내외(內外)의 주거지가 분포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송국리 유형의 원형 주거지를 중심으로 하는 집단의 문화적 특성으로도 볼 수 있으며, 일부는 세대 공동체의 분화와 같은 사회 현상의 한 단면으로 볼 수도 있다. 아직까지 조사가 모두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미 확인된 자료를 바탕으로 볼 때 금강을 중심으로 한 공주·부여·청양 일대에서 조사되는 유적의 대부분은 크게는 송국리 유형의 청동기시대 중기 무문토기 문화권의 범위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청동기시대 분묘 유적은 고인돌·석관묘·옹관묘·석개토광묘로 구분이 가능하다. 이 가운데 고인돌의 경우 지표상에서 유적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반면에, 석관묘·옹관묘·석개토광묘는 발굴을 통해서만 확인이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알려져 있는 대부분의 유적은 정식 발굴 조사를 통하여 보고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존에 조사·보고된 분묘 유적 가운데 금강 상류역인 진안 용담댐 수몰 지구의 여의곡·망덕·안자동·모정리 등지에서는 고인돌과 석관묘가 확인되었다. 금강 중·하류에서 조사된 것으로는 대전 궁동, 공주 산의리·분강 저석리, 논산 마전리·원북리, 부여 송국리·나복리, 서천 오석리 등에서 조사된 석관묘가 있고, 외형만 파악된 고인돌 중에 공주시의 경우 이인면의 초봉리 고인돌군, 구암리 고인돌군, 탄천면의 성리 고인돌, 분강리 고인돌이 있으며, 정안면에는 전평리 고인돌군이 있고, 그밖에 반포면의 국곡리 고인돌, 사곡면의 호계리 고인돌 등이 보고되어 있다.
분묘 유적 가운데 고인돌을 제외한 대다수의 석관묘(石棺墓)나 옹관묘(甕棺墓), 석개토광묘(石蓋土壙墓)는 주거 유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분포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들 개별 형식은 별도 공간에 분리되어 확인되기보다는 동일한 지역에서 함께 조사되는 경우가 많다. 공반되어 조사되는 분묘 형식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석관묘와 옹관묘의 관계, 그리고 석관묘와 석개토광묘의 관계를 통해서 구체적인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즉 석관묘와 옹관묘는 대부분 함께 조사되는데, 유구의 분포 상태를 보면 옹관묘가 석관묘군의 한쪽 모서리 부분에서 조사되는 예가 많다. 더불어 옹관묘에 사용된 토기는 모두 외반구연의 송국리형 토기의 정형성을 갖추고 있으며, 석관묘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송국리 유형의 석검이나 석촉이 많은 양을 차지한다. 이들 유적은 잠정적으로 송국리 유형의 문화에 포함시키는 것이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석관묘와 석개토광묘의 관계에 있어서 서천 오석리 유적의 경우 25기의 석관묘가 조사되었는데, 여기에서 단판석식 석관묘에서 석개토광묘로의 점진적인 변화 모습이 확인되었다. 즉 남산리 선사분묘군에서 확인되는 이단 토광을 갖춘 토광묘의 경우 대부분 석개토광묘로 볼 수 있는데, 이들 유적은 석관묘 나아가 송국리 유형의 문화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면 금강의 중·하류에 해당하는 공주·부여·청양·서천 일대에서 조사된 선사 분묘는 주거 유적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송국리 유형의 문화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금강 유역 선사 문화의 특징]
금강 유역 선사 문화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유적의 입지상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은 금강의 하안(河岸)에 바로 인접해 있는 특징을 보인다. 물론 조사된 유적의 예가 많지 않다는 한계가 있으나 대전 지역에서 조사된 둔산 유적의 경우도 이와 유사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금강 유역의 신석기 문화는 신석기 전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존속되었으며, 특히 내륙 지방에는 후기 단계에 들어와 유적의 밀도가 높아진다. 유적의 분포는 대부분 금강의 본류에서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는데, 금강에 분지(分枝)되어 있는 지류에 인접한 구릉 지대에 분포하는 등 생활 영역이 점차 넓어지는 모습으로도 볼 수 있다.
청동기시대 유적은 금강과 분지된 지천을 중심으로 넓게 확산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가깝게는 금강에 바로 인접해 있는 경우가 있으며, 일부는 금강의 본류에서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적이 금강과 연관되어 있는 지천이나 주변의 구릉 지대에 분포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청동기시대 유적의 밀집상은 구성원의 증대와 더불어 생활 영역이 넓게 확대되었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하며, 더불어 집단 사이의 생활 영역의 분포가 다른 시기에 비해서 보다 조밀해졌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즉 채집·어로와 같은 일차적인 수집 형태 이외에 초보적인 농경과 같은 이차적인 생업 경제가 활성화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금강 중상류 지역의 경우 일부 청동기시대 전기의 주거 유적이 조사되었지만, 금강 중하류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조사된 주거 유적은 대부분 송국리형의 원형 주거지가 조사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물론 앞으로 조사의 증가를 기다려야 하겠지만, 최근 송국리 유형의 유적 연대를 BC 8세기대로 편년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금강 중·하류역에서는 전기 무문토기 단계의 세장방형 주거지 문화보다는 송국리 유형을 중심으로 한 원형 주거지 문화가 강하게 자리하고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분묘 유적 또한 고인돌이나 석관묘, 옹관묘, 석개토광묘와 같이 대부분 송국리 유형과 관계가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 구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시기가 내려올수록 선사인들의 생활 영역이 금강의 본류역(本流域)에서 점차 분지(分枝)된 주변 지역으로 넓어지는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하여 생산 양식의 변화와 더불어 자연에 대한 인류의 생산 경쟁력이 확대·발전하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금강 중·하류역의 청동기시대 주거·분묘 유적은 주로 송국리 유형의 문화가 밀집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물론 전기 무문토기 관련 유적의 조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일찍부터 금강 중·하류 지역에서는 전기 무문토기 문화와는 구별되게 송국리 유형의 문화가 강하게 자리하고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